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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을 하면 조금 부끄러울 뿐이다

by 릴랴

틀린 말을 한다 해도 그 말이 좋은 영향을 끼치고 건전하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말을 내뱉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약점을 잡히면 안 된다고 배웠고 사람들은 틀린 게 아니라 모두가 다를 뿐이라고 배웠지만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비판을 받거나 일상적으로 맞춤법을 조금만 틀려도 수준을 알겠다든지 이런 것도 틀리는 사람하고는 말하기가 싫다든지 하는 말을 흔하게 접했다.

뭔가를 조금 틀리는 게 혹은 대다수가 그렇다고 믿는 것을 소수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대단한 실수이고 그 행동이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싸잡아서 말해지기도 한다. 나도 크고 작은 실수로 흠이 잡히거나 틀린 말을 했을 때 꼬투리가 잡혀서 무안해지거나 부끄러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지고 소심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았고 사람을 잘 만나지 않게 되었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가시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감각은 상처로 남아있고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래서 강렬한 의문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철저하게 감추고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떳떳하고 퍽 정직한 태도로 사는데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게만 주의하고 말하면서 마침내 이 모든 것에 개의치 말아야 할까? 그런 의문이었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을 곧잘 쓰고 들었다.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연설 중에 동양에 있는 나라인 중국말로 위기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쓰인 ‘위’는 위험하다는 뜻이고 ‘기’ 자는 기회라는 뜻을 쓴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말로 위기(crisis)는 위험밖에 없지만 중국말로 위기는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온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을 했다. 지금도 그 말이 유명했지만 사실 그건 1940년대 그 당시의 번역의 오류로 한자를 잘못 읽어서 잘못 알고 썼던 거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정확한 뜻은 사실상 틀렸어도 일촉즉발의 상황의 사람들의 마음을 단결시키고 힘들었을 나라의 상황을 구했던 말이었다. 지금까지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 말을 간간이 쓰면서 마음을 굳게 다잡는 말로 쓰고 있었다.


백조가 물 위에 떠있기 위해서 수면 아래에서는 발버둥 치고 끊임없이 발길질을 한다는 말도 잘 쓰지만 사실 백조는 아래도 우아하고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물에 잘 떠 있다.


하지만 그 말 또한 잘못 알려진 비유였어도 지금의 단단해지고 좋은 모습이 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해왔다는 말을 대변해 주기 위해 사용하면서 많은 용기와 위안을 주었던 건 사실이다.


물론 기본적인 조사는 조금 해봐야겠지만 너무 많이 시간을 끌 일은 아닌 것이다. 너무 많이 시간이 끌리면 행동과 추진력에 차질이 생기고 준비하다가 지쳐서 아예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조사와 준비는 적당히 하고 돌입할 수 있으면 바로 하는 게 좋아 보인다.


바르고 정확한 정보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건 중요한 태도이지만 사람이 항상 맞는 말만 하고 틀리지 않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걸 들키는 건 가끔은 무척 무안하고 부끄럽다. 틀리는 것에 급급해서 실수하지 않으려 한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고 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말이 맞다고 우기고 싸움으로 번지게 될 수도 있다. 조금 틀리더라도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변색되어 있지 않다면 또 그게 선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는 무언가라면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더 우리의 생각과 말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좋은 의도와 목적과 힘이 되고 일으켜줄 수 있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면 언젠가 누군가가 사실은 저 말은 다 엉터리였다고 말해도 그 사람과 같이 허허 웃으면서 그렇냐며 선뜻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정말 선한 의도였고 그걸 바라서 한 말이었다면 이미 그 말이 가진 목적성은 이루어진 거니까.


나이가 들어도 틀에 박힌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데도 어린 학생들처럼 열정과 호기심으로 눈에 생기가 돌면서 자신의 일이 즐겁다고 말했던 사람, 얼굴에 있는 주름이 무색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와 영상은 달라서 실제는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만 영상으로 올려진 건 죽은 느낌이 든다는 대화를 지인과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눈은 영상으로 봤어도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나이 들어가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건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동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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