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질 짜는 건 아니지만>
무엇이 더 어려운지 생각했다. ‘네’라고 말하는 일과 ‘아니요’라고 하는 일 중에서 무엇이 더 어려운지를. 생각해보면 ‘네’가 몹시 어려울 때가 많기도 했다. 웃기지 않는데 웃었던 일, 부당한 취급을 당했을 때 이를 악무는 일, 인종차별을 겪었을 때 꾹 참고 아무 말 않는 일 모두 무척 어려웠다. 테베의 왕 크레온은 칙령을 거역하고 반역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흙을 덮어 고인의 장례를 행하다 잡혀 온 안티고네에게 ‘네’라고 말하면 행복할 거라고, 그다음 방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했지만 안티고네는 ‘아니요’와 죽음을 선택했다. 그 모든 ‘네’ 이후에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저 훼손된 행복이었다. 그것을 누리느니 사형당하는 일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모든 ‘네’들 또한 무탈함과 고요를 가져왔는데, 늘 훼손되어 있었다. 무엇을 위한 ‘네’였을까.
안티고네는 모든 것을 외면한 채 훼손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아니요’는 안티고네에게 쉽지 않았다. 어떤 이념을 갖고 그것 때문에 죽는 것은 남자애들이 하는 일이라는 언니 이스메네의 말에, 여자애라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고 이를 악문다. 사내아이를 낳는 것이 그의 죽음보다 더 필요하다는 크레온의 말에 또 ‘아니요’라고 말한다. 여태 이를 악물고 서럽게 살아온 안티고네, 그 작은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흙을 팠다. 어쩌면 폴리네이케스를 위해서가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태 살아왔고 앞으로 누릴 그 모든 훼손된 행복을 견딜 수 없고 입속에 맴도는 ‘아니요’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었지만 사실 그는, 자기를 위해 죽었다.
옳은 일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흙을 덮어야 했다. 그 후에 죽음이 있다고 하면 그저 죽음을 향했다. 살기를 원하면서도 죽음을 향해 걸었다. 시체에 흙을 덮어주고 돌아온 날 새벽, 안티고네는 이스메네를 만났다. 자신이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이스메네는 그에게 울음을 머금고 다가갔다. 안티고네는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함께 질질 짜지는 말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요’를 행하면서 질질 짤 이유가 없다는 게 매우 당연해서 웃겼기 때문이다. 우는 일은 부담스러운 소모였다. 그는 그저 싫어하는 모든 것에 ‘아니요’를 행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겸손하고 싶지 않고, 온순했다면 얻을 수 있는 작은 조각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자주 온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반성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숱한 ‘네’들은 어려웠다. 무능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의 ‘네’를 비난할 수 없을 테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왕이면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죽임 당할 용기는 없었지만 그건 안티고네도 마찬가지였다. 용감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는데, ‘아니요’가 가져올 모든 일들이 두려웠다. 엊그제도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에 ‘네’라고 말했었다. ‘아니요’라고 한 번 해볼까. 온순함이 주는 작은 조각과 자주 누리는 훼손된 행복에 등을 한 번 져볼까. 도처에 도사리는 ‘네’들을 외면해볼까. 갈팡질팡한다. 어쩌면 용기가 아주 상관없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안티고네가 죽자 약혼자 하이몬도 자살했고, 하이몬의 엄마 에우리디케도 자살했다. 크레온은 혼자 남았고 그것을 알게 된다. 그의 다음 일정은 심의회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네’를 행한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불쌍한 크레온은 무엇도 이해받지 못하고 삶을 잇는다.
나는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사이에서 죽음으로도 삶으로도 결심하지 못한 채 있다. 그저, 지금 내가 질질 짜지는 말자고, 되뇌면서, 여러 가지 앞날을 고려한다. 망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