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번번이 답이 없나, 그저 모르기만 하는 나]
감염병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가 사라지는 이야기였다. 살해와 살아남음과 생이별과 사별과 패배와 반항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자연을 묘사한 문장이 몹시 아름다워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테면 '바람에 쓸리고 닦인 하늘에서는 맑은 별들이 반짝이고, 등대의 머나먼 불빛이 가끔 가다가 거기에 순간적으로 회색 빛을 섞어 주곤 하는 것이었다.'와 같은 문장에서 그랬다. 코로나 19가 인간이 아닌 생명들에게 힘을 보탰다고 한다. 책이 묘사한 하늘이나 바다에 관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 생명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도 세상은 변함없거나 더 나아진다. 가슴께 깊숙한 곳이 시렸다. 꼭 추운 날 숨을 깊이 들이쉬는 것 같았다. 사람을 사랑하지만 미워하기 때문이었다.
사월부터 시작된 페스트는 이듬해 이월까지 프랑스의 작은 도시 오랑을 휩쓴다. 리유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소개되듯 등장한다(그들이 모조리 남성이라서 당황스러웠다). 페스트의 한가운데에서 저들이 어떻게 살고 죽는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된다.
페스트가 돌기 시작하고 오랑 시는 폐쇄된다. 사람들은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취재차 잠시 온 오랑에 갇힌다. 함께 지내던 사랑하는 애인을 바깥에 두고 갇혀버린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탈출을 시도한다. 신부 파늘루는 페스트가 신의 분노에서 비롯된 악한 인간에 대한 징벌이고, 짚과 낱알을 가리기 위한 타작이라고 설교한다. 타루는 의사 리유에게 찾아가 보건대를 조직하자고 제안한다. 리유는 받아들인다. 시간이 흘러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다.
판사 오통의 아들, 작은 소년이 페스트에 감염된다. 저자는 매우 면밀하고 길게 그의 고통을 묘사한다. 신부 파늘루 또한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었다. 소년은 악하지 않았다. 무죄한 어린아이가 페스트로 죽자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리유는 어린애들 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죽어도 거부하겠다고 대답한다. 소년의 죽음 이후 파늘루는 달라진다. 그때 즈음 사람들은 종교보다는 미신에 더 의지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한 번 더 설교한다. ‘여러분’이라고 청중을 부르지 않고, ‘우리들’이라는 주어를 쓰면서. 신을 혐오하든가, 사랑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우리는 감히 증오를 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이 어린애의 고통과 죽음을 지워 줄 수 있다고도 말한다. 모든 것을 믿거나,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얼마 후 그는 페스트로 죽는다.
나는 닥치는 대로 살해를 저지르는 재앙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믿을 수 있을까. 대상 없는 분노에 휘말려서 침묵하는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지는 않을까. 재앙에 투쟁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에 저항할 수 있을까. 페스트는 전쟁이고, 죽음이고, 폭력이고, 학살이었다. 나는, 그 모든 이름들 앞에서 어디를 향해 설 수 있나.
타루는 페스트 시대가 도래하기 한참 전에 죽음을 목격한다. 사형선고와 사형수와 사형 집행을 보게 된 후, 사람을 죽게 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여태 간접적으로라도 혹은 선의에서 비롯되었더라도 살인에 침묵해 왔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살해가 만연한 이 도시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페스트에 저항한다. 그 또한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는다. 그가 평화를 찾았기를, 죽음 너머에서는 부디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타자의 죽음을 타자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등장부터, 죽어가는 쥐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자기의 옳음을 점검하고 고통과 부끄러움을 안은 채로 사느라 마음의 평화를 잊었던 사람.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공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쌍한 타루가 평화를 찾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신문기자 랑베르에게도 부끄러움은 큰 계기가 된다. 랑베르는 소설이 4부에 이르기까지 오랑을 떠나기만을 갈망한다. 사랑하는 이가 그립기 때문이다. 자신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계속 변명한다. 그러다 오랑에 남기를 택한다. 혼자만 행복하는 일은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행복을 좇는 일은 부채감을 갖는 일이다. 나는 부채감을 떠안은 채 이년 째 여행 중이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알기 위해 떠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나의 행복을 단념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의 여행은 혼자 행복하기 위함인가. 이 부채감은 부끄러움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나는 왜 여태 여행하는가. 자꾸만 물음이 든다. 오랑에 머물렀어야 했다. 내가 있는 이곳은 과연 오랑이 아닌가. 글쎄, 아직 모르겠다.
페스트가 힘을 잃고 오랑이 이전의 일상을 되찾으려고 할 때, 그 환희 속에서 기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랑베르는 애인을 다시 만났지만 의사 리유는 친구였던 타루도 잃었고 아내도 잃었다. 그에게는 평화 혹은 환희가 틈을 탈 자리가 없었다. 그런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다시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전쟁과 죽음과 폭력과 학살 다음에는 ‘승리’ 혹은 ‘환희’가 엉덩이를 대고 앉을자리는 없다. 그러나 번번이 그것들은 뻔뻔스럽게 찾아와 사람들을 기만한다. 그것들이 모른 척 앉지 못하도록 내가 애쓰고 싶은데. 그러면 나는 여행을 그만둬야 하는 걸까, 무엇이 그것에 도움이 되는 걸까. 리유에게서도, 타루에게서도, 파늘루, 그랑, 랑베르 그 누구에게서도 나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작품 안에는 이 세상이 있었다. 코로나 시대도, 전쟁도 죽음도 폭력도 학살도. 무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