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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May 10. 2020

<맥베스>

남자다움, 남자다움, 남자다움

 고전을 읽을 때면 시대를 관통하거나 묘사하는 문장들에 집중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의도하는 바를 느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 때가 잦다. 한계와 불편함을 애써 지울 때도 그만큼 잦다. 시대가 주는 한계이니까, 하면서 빠르게 넘어가려고 노력한다. 지난번 <페스트>를 읽을 때도 그랬다. 의사 리유의 어머니가 그의 집에 와서 지내기로 한 이유가 나올 때였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 “며느리가 병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에, 아들의 집안일을 돌보러 오시는 것이었다.” 리유는 페스트가 끝날 때까지 그것과 싸우면서 온갖 일을 겪어 내지만 집안일은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한숨을 쉬면서 형광펜을 그었지만 작품을 되새기며 글을 쓸 때는 애써 지워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애써보려고 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좀 심했다. 맥베스의 야망과 양심의 충돌과 그것이 자아내는 설득력, 마침내 그의 편이 되어 그를 가엾게 여기기까지 하도록 만드는 힘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나는 못 그랬다.


 맥베스는 남자답게 적군과 반란군을 물리친다. 남자답게 덩컨 왕도 죽인다. 자객들에게 남자다움을 얘기하면서 뱅코와 그의 아들을 죽일 것을 지시한다. 그러다 남자다운 곡조로 말하면서 그를 죽이기를 갈망하는 맥더프에게 살해당한다. 그전에 그를 살해하려고 했던 청년 시워드는 맥베스에게 패배하고 칼에 찔리는데 후에 시워드의 죽음 또한 남자다운 죽음이었다고 칭송받는다. 이 모든 남자다움들의 열거는 극의 시작과 끝을 관통한다. 남자다움은 악인에게 이용당하는 수단이 되거나 서로의 공로를 치하하는 데에, 혹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데에도 쓰인다. 다시 말해 온갖 곳에 쓰인다. 왜 그 온갖 곳이 전부 남자다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을까. 시대가 그랬으니까, 아니 그렇더라도, 아니 그때는 그랬으니까. 자꾸만 속이 시끄럽다. 안 남자다운 인간 모두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극에서는 여성의 것과 남성의 것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맥베스 부인은 자신이 탈성하여(여성성에서 벗어나) 잔인성으로 가득히 채워지길 악령에게 빈다. 해서 그는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할 수 있도록 남자다움을 이용해 설득한다. 양심과 야망이 충돌하는 맥베스에게, “이 일을 감행코자 했을 때 당신은 남자였고 전보다 더 과감해져 훨씬 더 큰 남자가 되려고 했어요.”라고 말하며 살해를 종용했다. 설득된 맥베스는 부인과 살해 계획을 논의한 뒤 “사내애만 낳으시오! 당신의 그 담대한 기질은 남성만을 빚어내기 때문이오.”라고 말한다. 왕의 죽음 이후, 맥베스 부인이 시치미를 떼며 등장했을 때 들은 대사는 “부인께선 제 말을 들으실 수 없습니다. 여자 귀에 반복하면 말하는 그 순간 죽어버릴 것입니다.”였다. 여성의 귀에 말하면 죽는다는 말이 우스워 살짝 웃었지만, 맥베스 부인의 탈성과 악행을 부각하는 대사이기도 했다.


 극 전체가 이분법적 요소로 가득했지만 이러한 두 성의 분리는 다르게 여겨졌다.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와 같은 대사나, 맥베스의 두 마음이 충돌하는 장면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와 뱅코우가 걸어간 양극의 길, 성군 덩컨과 폭군 맥베스 등의 요소들은 관객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남으려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의 것과 남성의 것으로 묘사된 더없이 확실한 양극은 그저 극 안에 티 안 나게 숨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눈 뒤에 걸렸다. 넘어가기 어려웠다.


 인물 맥베스는 물론 설득력이 있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야망에 사로잡힌다. 야망과 양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야망으로 노선을 정하고 악에 잠식되어 간다. 처음부터 악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점, 예언을 시작으로 변화의 길을 걸었다는 점, 죽음을 앞두고 그 모든 것의 허무를 말한다는 점 모두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충분했다. 나는 그의 변화와 죽음이 안타깝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가엾고 애처롭기도 했다. 너무 이해되어 놀라웠다. 그러나 가시지 않는 궁금증이 나를 잡아끌었다.


 맥베스 부인의 야망은 맥베스의 것보다 더 불타오른 듯 보였으나 점점 생략되었다. 나는 문득 몇 년 전에 본 영화 <라라랜드>가 생각났다. 극 중의 세바스찬보다 미아가 훨씬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세바스찬이 꿈꾸는 음악에 관해서는 오랜 시간 관객을 설득하는 반면 미아가 꿈꾸는 연기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세바스찬이 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재즈인지 뿐 아니라 열고 싶어 하는 가게의 이름을 뭘로 정하느냐 까지도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하는데, 미아는 그저 ‘연기를 하고 싶어 애쓴다’ 정도로 소개된다. 미아가 직접 1인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지만, 어떤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것이 궁금해 오래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다. 영화 끝무렵에서 미아는 몹시 숱하여 지겨울 수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공한 여배우’가 그것이다. 어떤 연기를 하는 어떤 배우인지 궁금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이 내겐 그런 인물이었다. 왜 잠에 든 채로 손을 비벼가며 닦을 수 없는 피를 그렇게도 닦아댔는지, 왜 유언도 없이 그렇게나 갑자기 죽어야 했는지, 맥베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야망에 불타올랐으면서 왜, 갑자기 무너졌는지. 매우 궁금한데 자꾸 남자다운 얘기만 나왔다. 맥베스에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맥베스 부인을 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읽으면서 내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짜증이 솟았다. 남자다움을 치하하고 칭송하고 요구할 시간에 궁금한 얘기나 해주지, 하고 자주 생각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했다. 남자다움을 꼭 딛고 넘어가야 하는 고전들 때문에 골치가 좀 아프더라도 집요하게 궁금해해야지.


 <맥베스>가 가진 힘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포장도로에 널린 돌들 같은 남자다움들이 자꾸만 나의 주행을 방해했다.


 생략된 인물들의 서사가 필요하다. 궁금함을 물고 늘어져 이야기를 뽑아내고 싶다. 나는 전쟁과 죽음과 폭력과 학살과 싸웠지만 집안일은 못 하는 리유가 조금 한심했고, 미아의 1인극을 관람하고 싶었고, 맥베스 부인이 했을지도 모르는 유언이 궁금했다. 여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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