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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Aug 15. 2020

강화길 <음복(飮福)>

[허기진 채 쳐다보는 메뉴판]

 불안한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간다. 세나가 파악한 모든 것이 내 눈 앞에서 재생된다. 겪어본 적 없는 제삿날의 이야기지만 나는 안다. 제사가 아니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삶이니까. 그리고 혼자서만 순수하고 눈치 없고 깨끗한 남성 정우가 있다. 세나는 그를 사랑하여 결혼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여 침묵 하기로 한다. 무지의 권력을 계속 쥐어주기로 한다. 그리고 그것에 편승하기로 한다.


 세나의 외삼촌과 엄마 사이에는 오랜 차별의 역사가 있다. 가부장제는 아버지의 법이었고 집행자는 어머니였다. 세나의 엄마는 할머니로부터 숱한 불이익과 함께 ‘네가 나를 이해해주지, 누가 나를 이해해주겠니’라는 말로 이해와 감정노동을 강요받아왔다. 그런 엄마는 뒤틀린 분노로 집안에서 악역을 자처한다. 외삼촌의 자식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해 대며 누구도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를 가엾게 여기고 엄마의 편이 되리라, 그를 이해하리라 다짐하는 삶을 사는 세나는 정우의 집에서 악역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다. 시고모다. ‘애는 안 낳느냐’며 대뜸 질문을 하고 정우에게 가시 돋친 말을 빙빙 돌려가며 뱉는다. 정우는 부모와 할머니에게 늘 응원받았으나 고모의 딸 정원은 그렇지 못했음을,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할머니는 내내 고모의 식사를 방해할 정도로 손을 꼭 붙들고 있다. 할머니는 고모를 지독하게 의지한다. 또한 할아버지의 제사를 챙기는 일과 할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조건으로 정우의 삶을 터치하지 않는 합의가 존재한다. 세나는 이 합의의 과정과 결과를 시어머니에게 문자로 받는다. 정우는 모르게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세나가 단 하루 저녁에 모조리 파악해버린 그 식구들의 성향과 분위기와 행동의 인과를 정우는 모른다. 놀랍게도 모조리 모른다. 진짜 악역은 정우다. 해사한 웃음으로 미움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가 진짜 악역이다. 특혜를 누리고 살았으나 돌봄 노동은 전부 면제받은 시아버지 또한 그러하다.


 이 가족 내 여성 구성원들은 모두 ‘가부장제의 부역자’이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 악역이 되냐 하면 텔레비전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와 비슷한 방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늙은 아들의 결혼을 오매불망 바라는 여성들의 입을 통해 가부장제를 합리화하곤 한다. 또 시청하는 여성들의 입을 통해 ‘저들과 같은 시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생산해 냄으로 가부장제의 ‘진짜 악역’을 가리고 가짜 악역을 전면에 내세운다.


 가짜 악역인 시고모, 정우는 모르게 해 달라며 집안의 역사를 문자로 보내는 시어머니, 잔인하게 차별하고 지독하게 매달리는 시할머니가 있다. 화자인 세나라고 다르지 않다. 정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가부장제를 잇는다. 이들 모두는 모두 피해자이며 생존자이다. 이들의 행동에는 전부 그럴만한 원인이 있다. 숨은 진실의 구조, 그것은 하루 저녁만에 전부 드러날 만큼 적나라하다. 저자는 이것조차 모르는 수혜자들을 조명한다.


 무지는 권력이다. 이 작품의 해설자 오은교는 이렇게 썼다.


 “절대적인 권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권력을 의식해야 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


  “제사라는 가족 행사가 잘 보여주듯 가부장제의 법은 아버지의 것이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노동자는 여성들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범용한 여성 혐오적 경구의 참 뜻은 가부장제라는 차별적 이데올로기를 매끈하게 만드는 모든 지저분하고 치사한 인식, 행위, 감정노동 들을 여성들이 도맡고 있다는 뜻이다.”


  “온 집안을 표표히 떠도는 그 모든 사랑과 증오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구김살 없이 해사한 면상이 바로 권력의 얼굴이다.”


 소설을 읽는 나는 이 모든 ‘사랑과 증오의 정치’를 파악하고 저들의 미움과 욕망까지도 이해한다. 위 인용구들은 이해한 것들을 설명해 주고 아버지의 법의 집행자들을 주인공으로 끌어올린다. 늘 변두리에서 가짜 악역을 도맡아 평등을 위해 싸우는 이들과 대립하거나 법의 주인인 남성들을 보조하며 돌봄 노동을 끌어안았던 그들은 강화길의 문장들 속에서 이해받는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내가 걸어갈 길을 다시 보게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세나는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딸’이라는 존재를 꿈꾼다. 이는 특권에의 욕망이다. 세나는 무지의 특권을, 다시 말해 계급 상승을 바란다. 세나가 반복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그 해사한 면상은 집요한 계급 상승의 열망이다. 오은교는 또 이렇게 썼다.


  “차별 구조에 기여하는 모든 젠더화 된 욕망을 단념해야 한다는 전도된 금욕주의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때 강화길의 소설은 말한다. 여성들의 문제적인 욕망을 교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배치되는 방식을 사유해야 한다고,”


 “이 법의 내용을 훤히 알게 된 집행자들로서 이제 여성들은 이 법률의 내용과 해석 체계를 모두 바꿔나갈 것이라고, 끝내 바뀔 때까지 여성들은 이 구조 내에서 가능한 한 더 많은 쾌락을 취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여성들은 겨우 악역이 되는 일 따위에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이다.”


 “첩첩의 차별 구조 속에서 무력과 냉소를 학습하는 대신 도약과 전복의 야망을 품는 여성이 여기 있다.”


 나는 아버지의 법과 집행자들 한복판에 있다. 세나처럼 나도 결혼했기 때문이다. 휘몰아치는 법의 주인과 집행자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나는 나의 자세를 늘 고민했다. 관조하면서 냉소적으로, 냉정한 자세로 서서 남에게  상처 주지 않기를 바랐다. 올곧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가부장제 내 어떤 계급 상승의 욕망을 품거나 혹은 이것을 멋대로 주물러 교묘히 이용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저자 강화길은 이러한 금욕주의를 뒤집는다.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고, 진짜 악역은 따로 있다고 말해 준다. 나는 아직 도약과 전복의 야망을 품은 적이 없다. 내 발로 걸어 행진하고 결혼하여 가부장제에 내에 스스로 깊숙이 들어온 이후, 그저 내가 고민한 것은 설 자리였다. 나는 쫄보다.


 어떤 야망을 품어 볼까, 허기진 채로 메뉴판을 보듯 침이 꿀꺽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간다. 내가 품어야 하는 것이 찬란한 성평등의 꿈일까, 계급 상승의 욕망일까. 계급 상승과 그것은 정확히 반대인가. 문제적 욕망이 배치되는 방식을 바라보는 나는 그것을 이어가지 않을 수 있나. 내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있나. 가부장제 한가운데에 있는 나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무엇을 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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