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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Aug 05. 2020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나는 도망 안 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매넌가의 저택은 적나라한 은폐의 현장이다.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된다. 매넌가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마스크를 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 같지 않고 무언가 감추어진 얼굴들이다. 벽에 걸린 조상들의 초상화들 또한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겉으로 보이는 전통과 위상을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이 감돌아 매넌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알 수 없는 그 힘은 은폐된 욕망이 아닐까. 어디로 향하는지 몹시 분명한 욕망이 얽혀 승리와 패배를 가져온다.


 라비니아의 욕망 안에서 정의와 평화는 몹시 적합한 핑계가 된다. 그는 정의를 실현하거나 평화를 누리려고 애쓰지만 그것은 모두 욕망에 기반한다. 그가 자기에게 내리는 처벌 또한 그의 욕망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정의는 그의 욕망이다.


 라비니아는 아버지 에즈라 매넌을 향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매넌은 배우자 크리스틴과 그의 애인 브랜트의 계략으로 독살당한다. 매넌은 죽어가면서 라비니아에게 자신을 죽인 사람은 크리스틴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끝나 귀향한 인물은 매넌 뿐이 아니다. 그의 아들이자 라비니아의 동생인 오린도 전장에서 돌아온다. 그는 어머니인 크리스틴에게 집착하는 인물이다. 라비니아의 말을 듣고 그와 함께 엄마를 미행하다가 두 사람의 밀회를 목격한다. 오린은 질투와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는 크리스틴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브랜트를 살해한다.


 저택으로 돌아온 오린에게 브랜트를 살해한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틴은 자살한다. 라비니아는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는 것이 정의 실현이라고 믿고 수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권총 소리가 들릴 때도 라비니아는 “이건 정의야!”라며 또 정의 타령을 한다. 그 정의는 버거운 욕망이다. 욕망을 위해 그것만이 정의여야 하기 때문에 절박하다.


 크리스틴의 죽음 이후부터 오린은 후회와 자기 비난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자신을 놓아버린다. 정의 실현을 이루어 낸 남매는 살해와 자살을 잊기 위해 일 년 동안 남태평양을 여행하고 돌아온다. 돌아온 라비니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엄마처럼 살이 올랐고 머리칼과 옷차림, 움직임과 말투까지 엄마와 꼭 닮았다. 오린이 그가 엄마와 비슷해진 것을 이야기하자 자신이 엄마처럼 예쁘다고 생각하냐며 수줍어하기도 한다. 크리스틴의 죽음은 그에게 해방이었을까. 라비니아의 정의 실현은 크리스틴이 없는 세상이었을까. 오린의 말처럼 그는 엄마의 영혼을 훔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는 오린에게 라비니아는 엄마를 법으로 처벌하지 않은 것이 보호였다고, 엄마의 자살은 스스로 선택한 처벌이라고 말한다. 정의 실현이었으니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독려한다.


 그러던 중에 라비니아를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포병 대위 피터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라비니아는 그를 향해 소유욕을 느낀다. 둘은 결혼을 계획한다. 하지만 오린은 엄마에게 그랬듯이 라비니아를 독점하고 싶어 한다. 또한 그가 홀로 죄책감을 벗고 행복해지는 일을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반대한다. 자신이 지금 고통 속에 살고 있듯 라비니아도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비니아는 자백하고 죗값을 치르고 평화를 찾자는 그에게 정의만 있을 뿐 평화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오린은 엄마에게 용서를 빌고 엄마와 브랜트가 행복하기를 빌겠다며 후회가 담긴 말을 남긴 뒤 자살한다. 라비니아는 그가 죽을 것을 예감했지만 막지 않는다. 그리고는 초상화들에게 당신들과 끝장이며 자신은 엄마의 딸이고, 보란 듯이 잘 살겠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크리스틴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그는 매넌가 사람다워진다.


 욕망은 이제 그만의 평화를 향한다. 그에게는 지금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평화가 필요하다. 신념을 바꾼다. 귀를 막고 평화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정의와 평화를 이용한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피터와 함께 떠나려고 한다. 도무지 죽지 않는 죽은 자들을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애씀이 소용없는 일임을 이내 알게 된다. 자신을 처벌하기로 한다. 그것은 죽음이나 감옥보다 더 힘든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남은 생을 매넌가의 저택에서 홀로 보내는 것이 그가 내리는 처벌이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셔터를 못질해 닫기를 명령한다. 아마도 그는 초상화들과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이것은 속죄일까. 나는 이 형벌까지도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긍정과 낭만과 행복을 향하지 않을 뿐이다.


 작품 안에서 가장 큰 고통은 죽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편한 형벌이자 도망이다. 이 비극은 죽음으로 끝을 맺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 욕망에 허우적 대다가 죽음으로 멸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끝날 때까지 욕망을 멈추지 않는 이야기다. 그의 불행 또한 그의 선택이다. 욕망으로 물든 살해와 은폐의 정의 실현은 불행으로 완성된다. 무엇 하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 피터와의 파혼 또한 결국 그가 피터를 떠나보낸 일이다. 그는 저택에 묶여 홀로 남아 패배하기로 한다. 죽음으로 도망치지 않는 그는 패배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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