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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Jul 28. 202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어쨌든 나는 속물]

 기억은 상상이다. 주인공 박완서는 저자 박완서의 기억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다. 그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남이고 자신이고 가릴 것 없이 초라한 면을 가졌다. 보잘것없는 모습을 용감하게 내보인 문장이 자꾸만 나왔다. 갑자기 부러웠다. 이렇게 묘사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초라해도 될 것만 같았다. 용감하게 보잘것 없어진다는 것은 시원하게 멋있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특히 주인공의 엄마에게 잔인하다. 거의 발가벗겨진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드러난다. 그것은  수치스러우면서 위대하다. 시골에서 남편을 잃은 한 맺힘과 신여성을 향한 막연한 꿈, 서울을 향한 동경과 욕망과 아집, 시골을 향한 과시와 무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속으로 계산하면서 겉으로는 안 그런 척을 하는 이유 있는 속물스러움, 지하 좌파 조직 활동을 하는 자식을 강력하게 말렸지만 막상 그가 관두고 전향을 하니 미련을 보이는 이중성 외에도 엄마의 보잘것없음은 숱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빠짐없이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쩔 땐 엄마를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남의 집 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때, 어느 밤 주인공 박완서에게 삼국지를 들려주던 대목이었다.


 “엄마가 ‘옜다 조조야, 칼 받아라’ 하면서 그 동작까지 흉내 내느라 바느질하던 손을 높이 쳐들었을 때 엄마의 손끝에서 번쩍이는 바늘 빛은 칼 빛 못지않게 섬뜩하고도 찬란했고, 나는 장검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 우리 엄마가 겨우 바느질 품밖에 못 파는 게 안타까워 가슴속에 짜릿하니 전율이 일곤 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아’ 하고 소리 내어 탄식했다. 그 바늘이 얼마나 환상적이었을지 상상한 직후에 장검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여성들을 얼마나 놓치고 살았을까. 그 여성들이 전부 장검을 휘둘렀다면, 아니 그보다 더한 것들을 휘둘렀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마음이 뜨겁게 싸했다.


 나는 줄곧 그의 엄마를 이해했고 주인공과 같이 안타까워했다. 벗어나고 싶거나 미울 때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내 시선은 틈틈이 그의 오빠를 향했다. 


 주인공 박완서에게 엄마 아닌 직계 가족은 오빠뿐이었다. 오빠에 관한 이야기에는 동경이 많이 담겨 있지만 그 또한 예외 없이 벗겨진다. 시골에서 면서기로 일하는 숙부 덕분에 해방 이전, 오빠는 징용도 안 가고 가족들의 곡식도 별로 안 빼앗겼다. 그것은 분명한 특권이었다. 박완서의 오빠는 그런 특권이 부끄러워 직장을 그만 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별 쓸모가 없었다.


 “오빠가 아무리 자기가 누리는 작은 특권에 고민해봤댔자였다. 결국은 시골에서 숙부가 누리는 치사한 특권에 빌붙어 굶주림을 면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직장을 관둔 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 우리는 특권에 빌붙어 있을 뿐인데. 


 사실 부끄러움의 소용은 시대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지 않나, 우리는 모두 부끄럽고 치사하지 않나. 나는 내가 누리는 특권과, 내가 하는 고민과 양심과 부끄러움을 저울질했다. 나의 특권에 비해 그것들은 별로 쓸모가 없다. 결국은 모두 비겁한 일, 치사한 일이다. 내가 아무리 비인간동물의 삶을 생각한대도 나는 인간동물이다. 내가 아무리 가난에 관해 생각한대도 나는 내 앞으로 한 푼의 빚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사실 앞에서 나의 부끄러움은 소용이 있나.


 해방 직전 먹을 음식이 없을 때도 오빠는 마찬가지였다.


 “시골에 농토가 있는 지주에게는 반출증이라는 걸 내주어 일정량의 쌀을 서울에 들여오는 걸 허락했지만 그 대신 배급을 탈 수가 없었다. 오빠는 우리가 무슨 지주라고 그들이 주는 쌀을 마다하고 시골 쌀을 축내느냐는 것이었다. 오빠의 말은 옳았지만 오빠는 엄마 덕에 콩깻묵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저자는 콩깻묵 밥이 도저히 못 먹을 음식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세 가족 중에 엄마가 콩깻묵을 제일 많이 먹었고, 그다음은 주인공 박완서, 그리고 오빠는 안 먹었다. 오빠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시골 쌀을 축내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며 반대하면 안 되었다. 그도 콩깻묵을 먹었어야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화가 나면서도 창피했다. 가난해 본 적도 없으면서 가난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무턱대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우쭐댔던 내가 떠올랐다. 나는 콩깻묵 밥도 안 먹어 봤으면서 쌀을 못 타 오게 했던 박완서의 오빠보다 나은가. 아무리 소용이 없다고 해도 나는 부끄러웠다. 제발 아는 체하면서 재수 없게 굴지 않고 싶었다. 산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 계속 일어나고 안 그러려고 애를 써도 창피를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조금 숨고 싶었다.


 해방이 되고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말이 범람한다. 격동과 혼돈을 겪다가 전쟁이 일어난다. 서울에 살았던 주인공 박완서와 그의 가족들은 자꾸만 뒤바뀌는 애국의 꽁무니를 따라잡아야 했다. 서울의 애국은 김일성 수령을 예찬하는 것이었다가 이내 반공으로 바뀌었다. 이데올로기 싸움 속에서 주인공 박완서와 가족들은 수모를 겪었다. 인민군이 들이닥쳐서 두려워하면서 잘 곳과 밥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숙부는 사형을 당했다. 박완서는 사람들의 신고로 반공 청년단체에 끌려가 벌레처럼 기었다. 사람들은 점점 서울을 떠났다.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이들 또한 버티다 못해 피난을 떠나려는데 오빠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를 데리고 더 갈 수가 없어서 서울 어느 아는 빈 집에 허락 없이 들어가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서울 천지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박완서는 이 고요를 글로 증언하기로 한다. 빈집들에서 식량을 훔칠 생각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늘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 부끄러움이 겁나지 않는다. 목구멍보다 더 중한 것이 생겨난다. 부끄러워 말고 먹고 살아남아 복수하리라, 살아서 증언으로 복수하고 벌레에서 벗어나겠다, 생각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을 겁내지 않고 빈집을 털 계획을 세우는 그의 용감함은 마지막 문장에서 섬광처럼 빛난다. 이 순간에 주인공 박완서는 몹시 진지하고 강렬하지만 저자 박완서는 이 대목을 쓸 때, 당시에 그랬던 자신을 기억하는 채로 썼을 테다. 그도 그때의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멋지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글쎄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모조리 발가벗기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초라하기로 작정하면 하나도 안 초라해진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았다.


 감추고 싶은 마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고 싶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자꾸만 나를 멋지게 묘사하고 싶어 지는데 그럴수록 진짜 나는 되게 별로인 사람이 되어간다. 저자 또한 그런 욕망을 떨쳐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도 애썼다고 하니까 내 욕망이 허락을 받은 기분이다.


 안 초라해 지기 위하여 초라하기를 겁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매우 속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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