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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Jul 26. 2021

37- 시시때때로 듣는 여행길의 명언1

 쓸쓸한 가을 저녁이었다. 곰과 나는 한껏 멋을 내고 거리를 걸었다. 그는 낮은 문을 가리키며 자기가 좋아하는 가게라고 말했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고 조명은 어두웠다. 짜이와 커리를 팔고 인도 냄새가 나는 향을 피우는 곳이었다. 사직동에 있는 ‘사직동 그 가게’였다.


 인도에 사는 티벳 난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록빠’에서 만든 가게다. 티벳 여성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팔고 무척 인도스러운 잔과 그릇들에 짜이와 도사, 커리를 담는다. 이천 구 년 무렵에 다녀온 인도가 갑자기 너무 그리웠다. 다음에 우리 꼭 같이 록빠에 가 보자고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맥그로드 간즈에 가 봤으니 이곳저곳을 알려 주겠노라고, 그때 먹었던 케이크를 또 먹고 싶다고, 말하다 보니 들떠서 말이 빨라졌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 둘은 진짜로 록빠에 갔다.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인 몬순의 끝무렵이었다. 해발 이천 미터에서 폭우도 맞고 우박도 맞고 구름을 곁에 두었다. 솔개가 내 발아래에 보이는 마을 하늘을 날았다. 나라가 무너지는 바람에 히말라야를 넘어 정착한 사람들과 그들의 아기들을 만났다.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기도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도 하였다. 나라의 평화를 몹시 바라면서 오늘 가는 소풍에 부푸는  그들은 그냥 나 같았다. 반갑게도 생김새까지 우리와 닮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힘이 없는 사람들이 계속 힘없기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비폭력으로, 그러니까 무기도 아니고 주먹도 아닌 것으로 이길 수 없는 저항을 했던 사람들이 이 산골짜기에서 가르침을 따르고 밥을 먹고 아기를 키우고 돈을 벌고 있었다.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평화와 저항을 하고 있었다. 


 록빠에서 십 년이 넘게 티벳 사람들과 일하고 있는 한국인 빼마는 명상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인도의 높은 산속에서 뜨는 해를 보고 조용히 명상하며 따듯한 물을 마시는 그런 사람. 나는 그를 조금은 동경하고 존경한다.


 어느 날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시간에 별을 보러 산길을 걸었다. 별을 봐야 하니까 다른 빛이 없는 어둠 속으로 갔는데 깜깜해서 무서웠다. 빼마는 무서우면 별을 안 보고 손전등을 켜도 된다고 말했다. 애쓰지 말라고, 그러지 않아도 된 댔다. 손전등을 켜고 걷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껐다. 애쓰지 말라는 말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지금도 어쩔 때는 그 말을 떠올려 잠시 포기했다가 다시 용기를 낸다. 오래 기억나는 명언이다.


 키가 큰 나무들 틈으로 별이 귀엽게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와인을 샀다. 노상에서 술을 마실 수 없는 법 때문에 종이봉투에 넣어 몰래 마셔야 했다. 문 닫은 찻집 뒤 주인 없는 작은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나란히 앉아 하늘과 집들을 바라보았다. 가파른 산 위에 집들이 많았다. 지대가 높아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들을 통해 새어 나오는 촘촘한 빛이 꼭 아까 본 밤하늘의 별처럼 보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떠들었다. 인도와 중국과 티벳과 파키스탄과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 있게 말하고 들었고 교육과 평화와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깊어 잠이 오기 시작하자 일어나 다시 걸어 집으로 갔다. 잊을 수 없게 나른한 밤이었다.


 그때는 손바닥 만한 거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오는 방에 살았다. 매일 거미가 나타날까 불안했는데 그것은 내가 느끼던 불안 중에 가장 작은 불안이었다. 길어지는 여행에 혼자서 꼭 인공위성이 된 기분이었다. 지구는 바쁜데 나는 혼자 유유히 공중을 떠다녔다. 빼마는 이런 내 얘기를 가만히 들었다. 산 위에 있던 해가 뒤로 넘어가면서 타오르는 그늘을 만드는 근사한 피자집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생각은 나 자신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흘러가게 두자.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잠잠해졌어.”


 마음에는 시간이 지나야만 체득되는 근육이 있다. 충분히 아리송해하다 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점차 알게 되는 그런 것들. 이를 테면 겨울 밭 가운데에서 발견한 둥지 안에 잠들어 있던 털도 안 난 새끼 들쥐 세 마리가 징그러우면서도 귀하다 느껴진 이유라든가, 상대를 위해 한 일이 사실은 나를 위했음을 알게 되는 일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다. 빼마의 말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아리송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에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안 붙잡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년 정도 지난 지금에는 흘러가게 두는 법을 조금 알 것도 같다. 근육이 생겼다. 생각은 생각이고 나는 나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내 불안이 나 자신이거나 진실이 아니라는 것, 흘러감으로 나를 다독이는 법을 알기 시작했다. 흐르는 생각에 잠겨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그냥 어쩔 수 없게 둔다. 흘러가게 두니 어쩔 수 있는 것들이 남았다. 불안하여 잠 못 드는 밤에 지금 여기는 오늘 밤 만이 존재한다고 되뇌니 내일 낮에는 요가를 할 수 있다. 나는 지금의 나를 어쩔 수 있다. 근미래의 기후 위기를 걱정하며 내가 딛고 있는 공간이 위태해질 때, 고기나 해산물이나 유제품을 먹지 않을 수 있다. 스릴러 영화를 보고 괜히 공포에 휩싸일 때 몸을 움직여 팔 굽혀 펴기를 연습할 수 있다. 나는 조금씩 생각에서 멀어지고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구별하였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명언을 한다. 진지할 때도 있고 농담일 때도 있는데 잊고 살다가도 어느 날 떠올라 다시 이해하게 하는 그런 말들이다. 여행 중에 나도 누군가에게 명언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빼마의 말은 분명하고 정확한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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