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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Dec 31. 2021

<긴긴 여행이 끝나는 날에, 끝난 다음에는>

Nov 19. 2021 / 여행의 끝이자 이천 이십일 년의 끝에서

 불안은 정말이지 나의 숙명이었다. 가진 돈이 별로 없어 불안하였고 기후위기가, 전염병이, 누군가 나를 싫어할까 봐, 계획대로 되지 않을까 봐 등의 이유로 불안에 떨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불안들 사이에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꽤 많은 돈을 가지면 덜 불안할까 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모은 돈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서 십사 개월 동안 썼다. 돈은 쓸수록 불안을 더 가져왔다. 먹고 싶은 파스타를 한 그릇 추가하면, 욕실이 딸린 숙소를 예약하면, 된장을 사서 국을 끓이면 입꼬리는 잠시 올라갔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이런 식으로 돈을 다 쓰고 난 다음에는 시급이 더 높은 나라로 갔다. 적은 시간을 써서 많은 돈을 모으면 조금 더 오래 불안과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적게는 만 팔천 원부터 많게는 이만 오천 원이 넘는 시급을 받을 수 있는 호주에 왔다. 오래전 침략하여 몇 세대 째 터를 잡은 백인들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가서 일을 시작하였다. 땡볕에서 여덟 시간 동안 라임을 땄다. 농장주가 나쁘게 볼 수 있다는 말에 눈치가 보여서 선글라스도 안 썼다. 라임이 가시나무에서 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틀이 지나자 팔에 작은 상처들이 열 개도 넘게 생겼다. 그러다가 꽤 오랫동안 아보카도 접목을 배웠다. 수백 그루를 접목하고 어린 나무들을 보살폈다. 그늘에서 하는 일이라 다른 일 보다는 수월한 편이었는데, 어느 날 바나나 파트에서 일하는 슈퍼바이저가 근처를 지나가다가 나를 보았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여 동의 없이 내 모습을 영상 촬영하였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한국인 노동자를 협박해 왔었다고 들었다. 농땡이 피우는 영상을 가지고 있으니 자칫하면 농장주에게 영상을 보여주겠다는 식이었다. 나는 이러한 부당함을 참지 않았다. 수모를 당하면서도 꼭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항의하였고 사과를 받았다. 그리고 해고되었다. 고집이 세다고 소문이 나 버려서 그 동네에서 일자리를 다시 얻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때 즈음, 팔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바나나를 따서 짊어지고 옮기는 일을 하던 겨레의 몸도 거의 다 축났다.


 그 동네에 남는다고 해서 돈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호스텔에 팔 개월 가량 묵었는데 매주 내는 방세가 다른 데에 비해 꽤 비쌌다. 거기서 일하는 동안 모은 돈으로 한국에 사는 지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부조금을 내고, 처음으로 동생에게 용돈을 주었다. 오래되어 시원찮던 겨레의 아이패드를 새로 구매하고, 달에 한 번씩 한인마트에 가서 김치를 비롯한 식재료를 사 왔다. 이런 식으로는 더 버텨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 호주가 코로나 폐쇄 방역에 성공하기 시작한 작년 7월, 돈을 좇아 도시로 떠나왔다.


 새로운 일자리는 청소하는 일이었다. 주로 부자인 백인들의 집을 청소하였다. 아, 참으로 더러운 집들이 었다. 도저히 설거지를 하지 않는 집, 싱크대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집, 전자레인지 안에 곰팡이가 슬어있는 집, 카펫 위에 개똥이 있는 집, 절대로 변기 물을 안 내리는 집, 샤워 부스 안에서 오줌 누는 집, 썩은 토마토를 조리대 위에 두고 안 치우는 집 등등 충격적인 위생상태의 집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주로 이 주에 한 번씩 같은 집을 방문하는데 늘 비슷하게 더러워져 있었다. 싫은데도 꾹 참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제 하기 싫은 것도 꾹 참고 해 낼 수 있다.


 청소 일은 오후 두세 시면 끝이 났다. 시간이 꽤 비었다. 나는 더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저녁에 할 만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레스토랑 몇 군데와 카페에 면접을 보러 갔다. 합격한 곳들 중에 시급이 가장 높은 곳을 골라 일하기로 하였다. 일식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곧 아침에 허둥지둥 청소를 하러 가고 퇴근해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바로 다시 서빙을 하러 갔다가 지친 몸으로 돌아와 잠드는 나날을 보냈다. 익숙해지는 일상이었지만 몹시도 건조한 나날이었다. 나중에는 겨레도 나와 같은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리는 돈을 꽤 벌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많이 모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돈을 벌 수록 돈을 썼기 때문이었다. 처음 호주에 올 때 엄마에게 빌렸던 돈을 갚고, 어쩔 땐 비싼 레스토랑에도 다녀왔다. 가끔씩 마음에 드는 옷이나 신발도 사고 고장 난 휴대폰도 바꾸었다. 남들은 우리의 일상을 보고 절약하는 편이라고 말하였지만 우리 기준에서 이러한 일상은 굉장한 사치였다. 이런 사치를 지속할 것인가, 이대로 괜찮은가, 하며 마음 깊은 데에서 진동하는 불안을 외면하였다. 생각만큼은 아니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대충 다독여 보았다.


 문제는 내가 현재의 쉴 틈 없음을 팔아 돈을 벌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코로나도 없는 이 공기 좋은 데서 청소와 서빙으로 하루를 몽땅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부당하게 느껴졌다. 나에겐 불안한 현재도, 더 불안한 미래도 삶이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지금 불행하고 싶지 않음’이었다. 그러다 우리는 아주 가끔 별을 보러 호수에 갔다. 무게라 호수 근처에는 건물이 없어서 달 없는 날을 잘 골라 가면 별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돗자리를 챙겨가서 벌러덩 누운 채로 하늘을 보았다. 밝은 하늘에 검은 이불이 덮였는데 이불이 삭아서 구멍이 많이 난, 그래서 밝은 빛이 반짝반짝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늘이었다. 별을 볼 때면 황홀함을 느끼느라 불안이 실제로 잦아들었다.


 어느 날 겨레가 그랬다. 지금 보내는 시간에서 놓쳐버린 행복들이 돈보다 가치가 없겠느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나중을 위해서 지금 더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지는 말자고. 우리는 따로이지만 또 같이지 않느냐고. 나는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정말로 동감이었다. 자린고비와 욜로 중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와 불안은 남을 일이었기 때문에 그 중간 어디쯤에서 줄을 잘 타볼 일이었다. 종종 별을 보러 다녔다.


 낮이고 밤이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프거나 체력이 동나면 절대로 안 되었다. 몸이 아픈 것은 곧 손해 보는 일이었다. 체력을 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이십 분으로 시작한 운동이 나중에는 열 시간 동안 청소 일을 하고 나서도 한 시간도 넘게 운동할 수 있는 체력을 가져다주었다. 절대 못 하던 푸시업도 해내었다. 엎드린 내 몸을 두 팔만으로 들어 올렸을 때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점점 초연해지기 시작하였다. 늘 초연하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밀려오는 불안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내가 모은 돈이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였고 돈이 별로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느껴갔다.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았는데도 불안이 작아지다니, 놀라웠다. 겨레가 불안해하면 나는 초연을 잃지 않고 그에게서 그것을 제거하였고, 내가 불안할 때면 겨레가 그렇게 해 주었다.


 하지만 불안이 나의 숙명이었듯 어떤 날에는 기후위기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여서 밤늦도록 울었다. 외출할 때면 문을 잠그고 나왔는지 헷갈려서 문고리를 아홉 번에서 열 한 번 정도 흔들었다. 돈으로부터만 벗어날 일은 아니었다. 당장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가 있고 별이 있다고, 그러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문을 안 잠그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 나를 좀 믿어 볼 수 있을까,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그것은 자주 작동하였다. 매사에 초연하고 싶었지만 서두르지 않을 일이었다.


 어쩌다가 별을 보고, 매일 운동하고, 이따금씩 식당에 가다 보니까 어느새 시간이 흘렀다. 계약한 집 렌트기간이 끝난 뒤, 한국에 돌아갈 일만 남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마땅한 상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호주에 사는 내내 가보고 싶었던 울룰루와 타즈매니아 섬에 갔다. 꼭 하고 싶었던 스카이다이빙과 스노클링까지 하니 아예 안 불안하지는 않았다. 줄어든 잔고를 보고 한숨짓고 우울해하였다. 마지막까지도 우린 행복과 불안 사이에서 줄을 탔다. 


 호주를 떠나기 전날, 겨레와 나는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잤던 마지막 숙소는 백 년쯤 된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꽤 큰 마음을 먹고 욕실은 공용이지만 둘이서만 쓸 수 있는 트윈룸을 예약했었다. 실제로 가 보니 화장실은 이층에 있었고 우리 방은 지하였다. 게다가 방 전체에 하녀 사진과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과거 하녀들이 쓰던 방으로 보였다. 바로 위에 부엌이 있었고 발자국 소리와 싱크대 물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면 숨이 찼다. 그냥 평소처럼 싼 도미토리에서 잘 걸, 하면서 낄낄댔다. 편안하게 마지막 사흘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러긴 글렀다는 사실이 조금 어이없고 웃겼다. 여하튼 그런 방 안에서 우리의 긴긴 여행을 돌아보았다. 삼 년 반의 시간이었다.


 겨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체 미련이 많아서 바다에서 조약돌을 주우면 그 주위 모래를 털어내는 것도 아쉬워하는 그런, 뭐든 잘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삼 년 반 동안 머물고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니 이제는 울지 않고 작별할 수 있고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조약돌에 묻은 모래를 좀 더 잘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그가 대답했다. 그는 그게 무엇이든 쉽게 버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고 그랬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그가 이미 버려 버린 것들 중에 그러지 말았어야 할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달라져서 나는 몹시 기뻤다. 좋아하던 니트와 청바지를 망설임 없이 버리는 모습이 자주는 아니지만 잔인해 보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별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그를 더 안쓰러이 여기고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였던 ‘돈 모으기’가 달성되지 못한 일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일평생 돈이 매우 많아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돈을 버는 일이 불안에는 별 소용없다는 얘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실로 마음의 일이라는 사실, 계획보다 적은 돈을 가지게 되어 부끄럽긴 하지만 이제는 돈이 없어서 불안하지는 않다는 말. 아니 적게 불안하다는 말. 그런 말들을 나누었다. 이전과 달라진 우리는 마주 보고 웃으면서 믿기지 않는 마지막 밤을 하녀 방에서 보냈다. 분명한 마지막이었다.


 비행기에서 이 긴 여행이 어떻게 끝나는지 생생하게 적어보려고 하기 싫음을 이겨내고 노트북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피곤하고 떨린다. 이십오 시간 동안 이동하는 일이 끝나면 이제 어디서든 한국말로 말할 수 있고, 적성에도 안 맞는 청소는 안 할 거고, 아시아인 이주 노동자도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영어를 못 한다느니 잘한다느니 하는 소리도 이제는 안 듣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무도 안 물어보겠지, ‘땡큐’와 ‘쏘리’ 대신 ‘고맙습니다’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겠지. 산나물과 순두부와 잡채를 양껏 먹어야지, 하고 들뜬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다. 나는 이 여행과 울지 않고 작별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싫은 것도 꾹 참을 수 있고 초연하게 현재를 살 줄 알고 매일매일 운동할 수 있다. 긴긴 여행이 끝나 간다(끝났다). 삶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삶이 진짜로 여행일까. 그렇다면 삶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아니기를 바란다. 혹시 그럴 까 봐 겁이 나지만 일단 돌아가 보기로 한다. 여행과 삶이 얼마나 다른지 아니면 같은지, 아직 나는 너무 젊어서 일단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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