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고 살지는 말아야지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회사 후배 A로부터 오랜만에 메시지를 받았어요.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점심이나 커피타임 어떠세요?'
카톡도 아닌 회사 메신저로 보낸 걸 봐선, 분명 야근하다가 현타가 와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눈치였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A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봅니다. 혹시나 회사 사람들이 있나 보는 거겠죠. 다행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요.
"저...요즘 호구가 된 기분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A의 고백에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 했어요. A는 일도 잘하는 데다가 다정하고 친절해, 회사에서 인기 만점이었거든요. 상사의 총애를 받는 동시에, 모든 동료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1순위 직원이기도 했어요. 누구나 그녀의 착하고 긍정적인 성향을 좋아했죠. 그런 그녀의 입에서 이런 대사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A는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리듯, 말을 이어 갔어요.
"제가요...다들 급하다고 하시니, 도와달라고 하시니 제딴에는 열심히 해드렸거든요. 심지어 제 업무도 제쳐두고 그 일부터 했어요. 그런데 밑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왜 자꾸 저한테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키시는거죠?"
사건의 전말을 들어보니, 처음에 그녀에게 갔던 일들은 단지 '부탁'이자 '요청'일 뿐이었더라고요. 굳이 A가 하지 않아도 될, 그들의 업무. 바빠서 A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A가 갖고온 결과물이 너무 좋았던거죠. 책임감 있는 A는 성심성의껏 그들의 일을 처리해줬는데, 돌아오는 건 끊임없는 SOS였대요. 심지어 너무 당당하게 '요구'를 해서, 순간 이게 원래 내 일이었나 헷갈렸다고 합니다.
"이번 건 중간보고 자료 다 됐어요? 아니, 내일 발표해야 되는데, 아직까지 못하면 어떡해~~~~"
자신에게 업무를 떠넘겨 놓고는, 타임라인 왜 안 지키냐고 쏘아 붙이는 동료의 핀잔에 A는 엄청난 현타가 왔다고 했어요. 열심히 도와준 댓가가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니.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고도, A는 또 다른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거절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봤거든요. 그런데 거절하면 제가 괜히 분위기 망치는 사람 될까봐 겁나요. 요청을 안 들어 드리면, 나쁜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것 같고요."
그녀는 '착한 사람 딜레마'에 빠져 있었어요. 천성이 워낙 착하기도 했고, 불화를 싫어하는 성향이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주위의 여우같은 사람들은, 그 착함을 이용하기 바빴던거죠. 어떤 부탁도 다 들어준다는 소문이 들렸던지, 날파리 같은 사람들이 꼬여 단물만 쪽쪽 빨아먹기도 했고요. 기생충에 비유하면 너무 비약적이려나요?
그녀는 너무 답답해 앞으로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어요. 사람들이 미워져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서요. 저는 회사 선배로서, 오랜 사회생활에서 우러난 금쪽 처방을 내려줬어요.
"야, 그냥 마녀가 되면 돼. 착한 게 밥먹여주냐? 걔네가 너 월급주는 사람도 아니잖아."
진심 반 농담 반으로 이렇게 말은 했지만, 저도 알고 있었어요.
A도 저도 마녀 흉내조차 못낸다는 것을. 사람들 눈치 보면서 어떻게든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유형이라는 것을 말예요. 정작 시간이 없어서 A에게는 말을 못했지만,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었어요.
'너만의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봐. 그 기준 안에 드는 부탁은 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하는 연습을 먼저 해봐.'
같은 부탁을 들어줘도,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인지 혹은 거절할 수 있었는데도 참고 넘긴 일인지에 따라 마음이 참 달라지더라고요. A가 힘들어한 건 일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기준과 선을 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A의 대인배 같은 호의를, 호구로 치환해버리는 나쁜 종족들이죠.
하지만 회사에서 이런 사람들을 안 마주치고 살 수는 없으니, 결국 나부터 변해야 해요.
"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이 확실한 사람들 앞에서는, 부탁을 하려다가도 멈칫하게 되죠. 부탁을 거절하는 것 자체를 미워한다기 보다는, 이 사람에게는 이런 부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인이 되고요.
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싶으시다고요?
그럼 자신의 우선순위부터 한번 점검해보세요. 일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회사 생활에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는지 등등을 먼저 알아보는 거에요. 나부터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유 있고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나를 지킬줄 아는 사람만이, 끝까지 다정해질 수 있어요.
A처럼 선의와 호구 사이에서 고민하시는 직장인 분들께, '나다움'을 먼저 발견해보시라 말씀 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