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커피챗 - 진짜 그만둔대?

조용한 퇴사가 더 무섭더라

by 수풀림

"나 이번엔 진짜 그만두려고."

A팀장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퇴사를 선언했어요. '진짜로'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면서요. 말하면서 스스로 민망했나봐요. 그가 퇴사를 언급한 건 이번이 흠...백만 스물 두번째쯤 되었으려나요? 몇 달 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다시 때가 찾아왔나 봅니다. 지난 몇 년간 하도 똑같은 소리를 들어 귀에 딱지가 앉았지만, 짐짓 놀라는 명연기를 펼치며 A를 만류했죠.

"왜 그래~~~ 그만두긴 어딜 그만둬. 무슨 일 있었어?"

A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만둘 결심을 하게 한 사건들을 한 보따리 풀어 놨어요. 최 이사가 미팅 때 자기한테 소리를 질렀는데 열받아서 참지 않고 대들었던 얘기, 클라이언트가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주말까지 전화로 괴롭힌 얘기, 팀원이 고과에 불만을 갖고 평가 시즌 이후부터는 일을 아예 안 하고 있다는 얘기 등등을요. 자기도 참을만큼 참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만둬야 이 악의 고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하네요.


하지만 말하는 A도, 듣는 저도,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가 당분간은 진짜로 그만두지는 않을 거라는 걸요. 언젠가 그가 비슷한 퇴사 레퍼토리를 읊을 때, 제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 진짜 고생 많았다. 이놈의 회사 그냥 확 때려쳐 버려. 이제 미련도 없잖아?"

그러자 A는 흠칫 놀라며, 말꼬리를 흐리더군요.

"아니, 당장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파트 대출금도 아직 한참 남았어. 휴..."

직장인 여러분들도 이런 분들 주변에서 많이 보셨죠? 늘 말로만 '그만두겠다' 외치는 사람들. 반면 정작 사표를 내는 사람들은, 조용히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아요. 이직 준비를 하고, 다른 회사에 합격하고, 한 달 전에 퇴사 통보를 하죠. 이직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에, 되도록 현재 회사에서 굳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아요. HR에서 퇴사 사유를 물어보면 웃으며 이렇게 답할 뿐이죠.

"여기가 싫어서 그만두는 건 아니고요. 성장의 기회를 찾고 싶어서 이직하게 되었어요."


A팀장처럼 입으로만 퇴사를 외치는 사람들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들이 반복해서 그만두겠다 말하는 이유는, 회사를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래서일 겁니다.

'저 할만큼 열심히 했잖아요. 야근도 불사하면서 최선을 다했는데...'

'혼자서 팀과 성과 모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사실 버거워요. 힘들다고요!'

'B 팀장만 잘 했다고 칭찬해주지 말고, 저도 좀 인정해주세요."

하지만 우리 어른이들은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전쟁터로 비유되는 회사 내에서는 더더욱요. 내가 만약 이런 마음을 표현하면 찌질해 보일까, 인정욕구에 목마른 사람처럼 보일까, 질투나 하는 못난 놈으로 보일까 걱정부터 하죠. 대신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단순한 표현인 ‘퇴사’를 꺼내들어요.퇴사 카드는 아마 직장인 버전 SOS이자 비상벨이 아닐까 싶어요. 마음이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조난 신호를, 차마 내지도 못할 사표로 대신하는 거에요.


혹자는 이렇게 물어보실 지도 모르겠네요.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은, 그럼 나가기 전에 왜 비상벨을 울리지 않고 조용한 퇴사를 하냐고.

사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움을 청하고 비상벨을 눌러요. 다만 누군가의 비상벨은 엄청 크게 회사에 울려 퍼지고, 빠르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간주되는 반면, 어떤 경우엔 아무도 못 들을 때도 있어요. 혹은 못 듣는 척 하기도 하죠. 여러 번 도와달라, 나 좀 봐달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는 메아리로 돌아올 때도 있어요. 그때는 그냥 조용히 회사와 이별할 결심을 하는 거에요. 포기하는 심정으로요.

18년차 직장인인 제가 보기엔, 이런 경우가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한 신호 같아요. 차라리 회사에 이것저것 요구하고, 때로는 불만을 토로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아직 회사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남아 있는 거죠. 마치 A 팀장처럼요.


아참, A 팀장은 어떻게 됐냐고요?

모두가 예상하셨겠지만, 지금도 잘 다니고 있어요. 한 시간 가까이 실컷 회사 욕을 하고 나선,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어요. 그 때의 그가 필요로 했던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 옆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거였나봐요. 내가 이런 심정이다, 얼마나 힘든지 아냐, 누가 나 좀 알아달라는 이런 얘기들을요. 섣불리 판단하거나 조언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던 것 같아요.

물론 퇴사 카드를 시도때도 없이 꺼내는 건, 배우자에게 매일 이혼하자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중 하나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끼는 동료가 자꾸 그만둔다 말한다면? 잠깐만 시간 내서 그들의 속마음에 귀기울여 주세요. 도망가고 싶은 마음 뒤에 숨어 있는, 인정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토닥여 주세요. 그만두고 싶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누군가 내 심정을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는 걸 지도 몰라요.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경험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요.


#퇴사#신호#동료#경청#직장인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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