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의 ChatGPT는 뭐가 다를까

비밀을 파헤치고 싶다

by 수풀림

"여러분도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AI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업무에서 도태될 것입니다."

사장님의 신년 인사는 AI로 시작해 AI로 끝났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AI 혁명의 파도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 회사는 시스템보다는 사람의 터치로 굴러간다 생각했는데, AI가 도입되자마자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서둘러 사내 AI를 개발했고, 나아가 기업용 ChatGPT까지 계약했다.

AI로 리포트나 과제를 작성하는 대학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교수님들과는 반대로, 사장님은 임원들에게 AI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 자료 AI 제대로 돌린 거 맞아요? 제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AI를 잘 쓰시라고!"


임원이라고 왜 AI를 쓰지 않았겠나.

요즘은 AI 없이 보고서 쓸 엄두조차 나지 않는 세상인데. 하지만 사장님은 늘 ‘제대로’를 강조하며, 겉보기에 멀쩡한 보고서 초안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내곤 했다.

며칠 전, 그런 사장님께 직접 보고할 자리가 생겼다. AI 활용에 대한 잔소리(?)를 익히 들었던 터라, ChatGPT와 몇시간씩 씨름을 하며 만든 자료를 가지고 들어갔다. 열심히 설명을 이어 갔으나, 예상대로 사장님은 첫장부터 AI에 대한 질문부터 하셨다.

"AI 쓰신 거 맞나요?"

나는 당당하게 기업용 ChatGPT를 썼다 답했지만, 연이어 질문 공세를 퍼부으셨다. 어떻게 썼냐, 무슨 자료를 기반으로 AI를 돌린거냐, AI 답에 대한 레퍼런스 체크는 해봤냐 등등. 마지막에는 내가 어버버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자신이 AI로 직접 쓴 보고서 초안을 메일로 보낼테니 한번 참고해보라하며 미팅을 마쳤다.


메일함을 열고 사장님이 작성한 보고서를 열어 봤다.

어라, 이게 뭐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쓴 자료의 반도 안되는 분량인데, 거기엔 핵심 메시지가 또렷이 담겨 있었다. 분명 같은 의미의 워딩인데, 훨씬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 장만 읽어도 이해가 쏙쏙 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때부터 무척 궁금해졌다. 똑같은 ChatGPT를 썼는데, 사장님과 나의 ChatGPT는 뭐가 달랐을까. 같은 질문을 동료 팀장들에게 하자, 사장님 ChatGPT는 분명 비싼 버젼일거라는 농담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설령 그게 사실일지라도(IT에서는 절대 아니라 했지만), 나는 그게 다가 아닐것 같다 생각했다. 분명 사장님이 AI를 활용하는 방법에 따라 결과값이 크게 달라진거란 확신이 들었다.


차마 사장님께는 직접 못 물어봤지만, 혼자만의 짐작으로 'CEO의 AI 활용 비밀'을 몇 가지로 추려봤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비밀은, 바로 '통찰력'이었다. 이번 보고서는 2026 시장 전망과 그에 따른 우리 회사 비지니스 영향이었다. 나는 며칠동안 각종 리포트를 꼼꼼히 읽고 그게 맞는 흐름인지 교차 검증까지 했따. 하지만 내가 꼽았던 주요 시장 변화와, 사장님이 생각한 변화의 핵심은 조금 달랐다. 그건 아마도 그동안의 경험과 시장을 보는 눈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직원이 보는 시야는 아무래도 해당 업무 범위 안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사장님은 이미 많은 임원들로부터 생생한 시장 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CEO들끼리 네트워킹을 하며 얻은 정보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입력된 정보양보다 더 결정적 차이는, 그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정보인가를 선별해내는 능력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재능이라기보다는, 경력의 축적과 끊임없는 훈련에서 오는 힘이라 생각한다. 주변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는 연습 말이다.

할루시네이션을 장착한 AI가 설령 엉뚱한 답을 내더라도, 그것을 정정하고 제대로 된 방향성을 알려주는 건 통찰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두번째는 그 통찰력을 가능하게 만든 맥락지능이다.

'맥락지능'이라는 단어는 유튜브 컨텐츠를 통해 처음 접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똑같은 방법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걸 아는 능력이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 정답 그 자체보다, 이 정보가 언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쓰이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같은 데이터라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어떤 순간에는 인사이트지만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쓸모없는 자료가 된다.

사장님은 이번 시장 전망 보고자료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AI에 일을 시킨 것 같다. 이 보고서의 최종 검토자인 아시아 리더에게 어떤 정보가 필요할 것인가, 지금 상황은 우리가 전진해야될 때인가 혹은 어렵다 말해야할 때인가 등등을 AI에게 설명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입력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맥락을 이해하고 학습한 ChatGPT는, 사장님이 원하는 자료를 더 잘 만들 수 있다. 앞뒤의 상황이 반영되어, 자료의 전체적인 흐름과 스토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건 비단 AI뿐만이 아니라, 상사가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도 통용되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AI의 대혁명 시대.

어떻게 해야 이 흐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직장인인 나는 오늘도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해답은, AI의 활용법에 있을거라 생각하며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피는 중이다. 누군가는 AI를 써서 생산성을 향상하고, 또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진짜 답은 AI 사용법보다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걸.

사장님의 ChatGPT가 다른 이유는 사장님이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수십년간 쌓아온 통찰력, 상황을 읽어내는 맥락지능,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 그런 것들이 AI를 통해 증폭된 것뿐이었다.

AI는 결국 거울이다. 내가 텅 비어있으면 아무것도 비춰주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AI가 내 부족함을 채워줄 거라고 착각했지만, 정작 AI는 내 안의 것을 끌어내는 도구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질문을 바꿔야겠다. 'AI를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무엇을 봐야할까'를. '더 좋은 프롬프트는 뭘까'가 아니라 '왜 그럴까,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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