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의 시작과 끝, 청중

듣는 사람이 있어야 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by 수풀림

직장인으로 살면서 발표를 한 번도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상사에게 업무 성과를 보고한다던가, 회의 시간에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공유한다던가, 고객 앞에서 제안서를 발표한다던가 하는 상황을 수없이 마주한다. 이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도, 이직해서 들어간 회사에서 자기 소개를 하는 것도 발표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좋던 싫던 발표의 상황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학창 시절에도 줄곧 발표를 해왔다. 하지만 직장인의 발표는 조금 다르다. 학생 때의 발표는 준비한 내용을 얼마나 또박또박 잘 전달했는지에 평가 기준이 맞춰져 있다. 반면 직장에서의 발표 초점은 오롯이 '청중'에 있다. 발표 이후 청중이 얼마나 반응하는지, 그것이 그들의 행동 변화와 결정으로 이어지는지가 성공을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지난 주, 다른 나라 회사 리더 여러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팀이 잘 한 점을 듣고, 각자 적용할 포인트가 있는지 배우기 위한 취지로 찾아온 것이다. 내가 속한 전략 부서는 이 미팅의 주관자가 되어, 각자 발표할 사항들을 분주하게 준비했다. 어떻게 하면 그분들에게 한국 성과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끊임없이 논의를 진행했다. 발표자료 한 장을 만들더라도 전달력에 초점을 맞추어 공을 많이 들였다. 스크립트를 썼다 고치고, 발표 연습도 계속 했다.

드디어 발표 당일. 내 발표를 앞두고 미리 회의실에 들어가 대기를 했다. 그곳에 들어가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앞에서 발표자가 열을 띄며 얘기하는데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들은 각자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거나 딴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8시부터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진 빡빡한 스케줄 직후라, 집중력이 바닥날만한 타이밍이었다. 심지어 점심마저도 회의실에서 미팅을 하며 먹은 상황. 하필이면 가장 졸려울 시간인 오후 3시였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지켜보며,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했다.

앞서 발표한 동료 A의 세션에서는 졸고 있던 청중들이, 그 다음 발표자 B에게는 마구 질문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A의 발표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완벽한 PPT 자료뿐만 아니라 앞뒤 맥락을 반영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스크립트까지. 반면 B의 발표는 훨씬 즉흥적이었다. 발표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과 그냥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청중의 반응을 갈라 놓는 가장 큰 차이었던 것이다. B는 발표를 시작하며, 청중의 주의부터 환기했다.

"(영어로) 여러분, 많이 졸리시죠? 그래도 이번 세션만 끝나면 휴식 시간이에요. 오예! 제가 랩하듯이 엄청 짧게 말할테니, 잘 들어주셔야 해요."

스마트폰을 보던 청중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식 웃으며, B를 쳐다봤다. 그리고 B가 이어서 말하는 내용에도 귀를 기울였다.


A가 모니터속 스크립트에 몰두했다면, B는 오롯이 청중에게 집중했다.

그들이 자신의 발표 중 어떤 지점에서 반응하는지 민감하게 알아챘고, 그 부분을 다시 강조해주었다.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지점에서 잠시 쉬어가며, 질문이 있는지 물어봤다. 질문에 대해 상세한 답을 해주었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슬라이드는 과감히 건너 뛰었다.

그러자 청중들은 B가 발표하는 동안 그를 계속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쉬는 틈을 주니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한번 더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이 흐르고 관심이 생기니 자연스레 질문도 곳곳에서 나왔다. 질문이 있다는 건, 그것이 그들의 고민 사항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B는 영리하게도 이것을 잘 파악하고 그들에게 추가 질문을 던지거나 도움이 되는 팁을 주며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

아쉽게도 이는, 완벽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만 쉴새없이 이어갔던 A의 발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마도 발표 경험이 많지 않았던 A는, 시간 안에 자신이 준비한 내용을 모두 전달하는 게 발표의 성공이라 여겼던 것 같다.


직장인의 발표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발표의 시작과 끝 모두 '청중'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발표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이 무언가를 고려하고 결정할 때 내 발표 내용이 조금이라도 생각난다면 성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청중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듣는 사람이 없다면, 발표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초점을 청중에 맞추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첫번째다. 보통 회사에서 발표를 하는 경우 청중이 특정되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통해 그들의 니즈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발표 자료라도, 청중에 따라 전달하는 내용과 강조하는 포인트는 달라야 한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와, 동료에게 공유할 때는 완전 다른 상황인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로 청중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발표 준비를 할 때마다 자문한다.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발표는 언제나 듣는 사람으로 완성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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