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월급 말고 받은 게 없는 줄 알았는데

by 수풀림

회사를 다니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회사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지?'

특히 밤 10시에 사무실에서 나갈 때, 고객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주식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동료의 소식을 들었 때 등등.

누군가는 회사를 나와 자기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SNS에는 자유로운 삶과 성공한 독립 이야기가 올라온다. 그와 나는 뭐가 달라 아직 회사라는 울타리를 못 벗어났을까 싶어 자책하곤 한다.


회사에서는 늘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를 끝내면 바로 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잘해서 맡게 된 일인지, 사람이 없어서 떠안게 된 일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바쁜 게 당연한 일상이 되고, 문제 앞에서는 죄인이 되어 종종 혼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괜히 억울해진다. 회사가 주는 건 월급 말고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내 에너지를 써야 하나. 이렇게 산다고 과연 나한테 남는 게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회사 밖의 삶이 더 좋아 보이는 날에는,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일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얼마 전, 우연히 읽은 인터뷰 내용에서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20년간 광고회사에 다닌 노윤주 작가 이야기였다. 직장생활의 자산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출처 - 폴인)

"광고회사의 첫 회의를 진짜 좋아해요. 헛소리가 난무하는 회의. (중략) 살면서 필요한 스킬도 많이 배웠죠. 화날 때 화 내는 법, 화 참는 법, 눈치 보는 법, 눈치 안 보는 법…. "

아, 어찌나 재치있는 대답이던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다. 나에게는 헛소리가 난무하는 회의는 두통의 근원이었고, 화를 참고 삭이다 홧병에 걸릴 것 같았는데 말이다. 툴툴대며 욕을 했던 그 경험들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자산으로 꼽힌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관점으로 다시 회사생활을 돌이켜보니, 나에게도 제법 많은 자산이 있었다.

사무실 의자에 하도 오래 앉아 있어 길러진 엉덩이의 힘, 초등학생처럼 싸우는 동료들을 중재시키며 얻은 화해의 기술, 종종 안드로메다로 가버리곤 하는 회의 안건을 어떻게든 한 문장으로 정리해 결론을 내리는 마무리 스킬 등등. 여기에 덧붙여 상사한테 욕먹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마음 속으로 명상을 하는 멘탈 관리도 한 몫 하겠다.

조금 진지하게 업무적으로 접근해보자면, 100건도 넘는 제안서나 보고서를 쓰며 얻은 비지니스 감각, 대중 앞에서 덜 떨고 발표할 수 있는 용기, 각종 문서를 능숙하게 읽고 작성할 수 있는 능력도 귀한 자산이리라.


만약 내가 회사원이 아니었다면, 힘들고 지난한 직장생활을 견디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사람과 부딪히며 마음을 다루는 법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도, 예상 밖의 문제 앞에서 일단 방법부터 찾는 것도 아마 쉬이 터득하지 못했겠지. 그때는 그저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내 안에 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자산들이 앞으로 살아갈 내 미래의 자산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간과 경험들이, 가장 오래 남는 자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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