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없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직장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요.
"회사 그만두면 뭐 할거야?"
유사 자매품 질문으로는 '퇴사하면 뭘로 먹고 살거냐', '월급 못 받으면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혹은 '재취업 하기도 힘든데 제정신이냐' 등이 있어요. 설령 퇴사 이후 계획을 착실히 세운 직장인이라 할지라도, 이 질문에 쉽사리 답하기 어렵다더라고요.
몇 단어 안 되는, 참으로 간단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왜 한없이 작아질까요.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말처럼,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하겠죠. 그토록 출근하기 싫은 회사지만, 분명 회사가 주는 안정감은 존재하니까요.
얼마 전 40대 후반의 직장 선배 A가, 요즘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며 커피 타임을 요청하더라고요.
무슨 큰 일이 났나 싶어 걱정되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갔어요.
"내가 지난 번 모임에서 들었던 질문이 뭔지 알아? 회사 명함 떼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잖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새로운 소그룹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했나봐요.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룰은 단 한 가지. 회사명과 회사 업무를 절대 언급하지 말고, 1분간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었대요.
"나 엄청 쇼크 먹었다. 1분은 커녕 10초 지나니 할 말이 떨어지더라."
A 선배는 유명한 워커홀릭이에요. 책임감이 높아 리더 자리에 앉은건지, 혹은 리더가 되니 책임감이 높아진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회사에 온 인생을 바쳤어요. 헌신한만큼 회사에서 유능한 사람이라는 인정도 받았죠.
"직장 생활만 20년 넘게 해서 그런가. 회사 빼고 나를 설명할 말이 없더라고."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어요. 회사에서 야근하다 집에 가서 잠든 가족들을 보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는 일상. 주말에는 밀린 잠과 유튜브, 가족 경조사 말고는 특별할 일 없는 일상. 거래처 고객과 영업을 위해 치는 골프 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없이 살아온 삶.
A 선배에게 회사는 곧 그의 인생 전부였던거에요. 회사 명함이 곧 정체성이자, 그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수식어였던거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과연 나는 어떤가 하고요. 10년 전 저도 선배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회사 다니면서 처음 들었던 질문이었고요. 당시 단 한 마디도 못 했던 제 모습이, 충격 받고 당황해하는 선배의 모습과 겹쳐 보이더군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실 회사 명함 빼고 제 자신을 소개하기 어렵고 어색해요.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의례 명함을 주고 받거나, 'OO 회사 다니는 OOO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훨씬 익숙하거든요. 또 편리하기도 하고요. 더 이상의 꾸밈 말이 필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이후 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소위 '자각'이라는 걸 했달까요. 회사 밖의 삶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거죠. 회사를 그만뒀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고민하고 상상하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건 하나도 없어요.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고, 출근하기 싫어하며, 야근도 밥 먹듯 하고 있죠. 하지만 회사를 그만뒀을 때 , 막막함만 떠오르던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어요. 나의 회사 밖 관심사를 찾아다니고 있고, 작은 것들을 배우며 시도하고 있어요. 설령 그게 나를 먹여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라도, 관심 분야라 재밌으니까 그냥 해보는 거에요.
우리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죠. 하지만 그 시간이 나를 전부 설명해주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직장인들은 회사를 잘 다니기 위해서라도, 회사 밖의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회사 밖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 속에서 나를 알아가고, 그게 또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거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회사원이던 아니던간에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명함이 사라졌을 때도 남아 있는 것, 그것이 결국 내가 오래 붙잡고 살아갈 ‘나’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