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에도 면역력이 중요하더라고요
그 날은 며칠간 준비했던 보고 자료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몇 번이나 수정하고 공들여 만든 자료라, 나름 자신 있었다. 안 깨질 자신, 준비 잘 했다는 칭찬을 받을 자신까지. 축구에서 골 세레모니를 하듯, 만약 내가 칭찬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혼자 상상까지 해봤다.
그러나 운명은 이런 나를 비웃으며, 자만심 넘치는 예측 따위는 없던 일로 만들었다. 호랑이 같은 대표 뿐만 아니라 하이에나 같은 임원들까지 자료를 물고 뜯으며 공격했다. 신나게 혼이 나고, 멘탈이 탈탈 털렸다. 방어할 기회가 있었지만, 어버버하다가 그만 회의가 끝나 버렸다.
터벅터벅 자리로 돌아오는 길, 동료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너무 실망하지 마. 준비 잘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은 거 같아."
괜찮냐는 질문을 받자,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멀쩡하다는 것을.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자리에서 지적과 비난을 받고 나서 전혀 괜찮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며 며칠간 자책했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타격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 상태를 걱정해주는 동료들에게 씩 웃으며 답했다.
"어? 나 면역력 생겼나봐. 예상보다 아무렇지 않은데? 우리 그냥 시원한 거나 마시러 가자."
상처를 아예 안 받은 건 아니었지만, 의외로 이 상황이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회사 생활에도 면역력이 있어 그런건 아닐까 싶었다.
직장인에게 필요한 회사 생활 면역력이란, 아프고 쓰린 상황을 버텨내기 위한 일종의 ‘정신승리’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 면역세포가 싸우듯이, 회사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말과 힘든 상황에도 나름의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괜찮아, 그냥 흘려 보내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걸.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정신적 힘이 되어준다는 걸 말이다.
백신을 맞으면 독감에 걸려도 덜 아프듯이, 회사에서 겪은 크고 작은 경험들도 면역력을 키워준다.
이럴 때 이렇게 대처하면 된다는 머릿속 매뉴얼도 생기고, 김부장의 고함에 매번 놀라는 대신 슬쩍 이어폰을 끼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한다. 경험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적응하고, 잘 살아갈 힘이 생긴달까.
그렇게 하나씩 쌓인 경험들은, 결국 나를 덜 흔들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다만 그게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아프고, 때로는 속상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회사 생활에 필요한 건, 상처받지 않는 단단함이 아니라 상처를 흘려보낼 줄 아는 나만의 면역력인지도 모르겠다. 혼나고 나서 동료랑 마신 시원한 딸기라떼가 유난히 맛있었던 것처럼.
#회사생활#직장인#면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