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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Feb 05. 2024

지리산에 간 남편

하루에 28km 실화?!

연애 9년 + 결혼 14년 = 도합 23년 동안 알고 지내온 남편이라는 사람은 나와 참 많이 다르다.

연애 시작할 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살아갈수록 더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는 식물성, 남편은 동물성이랄까?

음식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채소와 해산물파, 남편은 고기 그리고 오직 고기파.

시작하기 전 생각과 걱정이 많은 나인데, 남편은 먼저 행동하면서 많은 걸 해결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책, 글, 미술 등)은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조용한 취미라면,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자전거, 달리기, 등산 등)은 죄다 폐활량 최상급 아웃도어형 취미이다.


2007년부터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자전거 타기는, 남편의 최애 취미로 자리 잡았다.

요즘은 주변에 자전거 타는 분들이 많아져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자전거 한 대 값이 자동차 한 대 값인 경우도 있어 이 취미를 유지하다가 월급 다 날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남편은 자산을 탕진하기 전 나한테 쫓겨날(?) 염려가 있어, 근근이 중고로 자전거 용품을 구매하며 이 취미를 유지하고 있다.

주로 3월부터 11월까지는 주말마다 동호회 사람들과 짧게는 70km, 길게는 100km넘게 타며, 자전거에 푹 빠져 지낸다. 그리고 비수기인 겨울에는 쉴 법도 한데, 굳이 실내에다가 자전거를 들여놓고 또 탄다.


그러다 갑자기 몇 주전, 남편은 자전거 대신 '트레일런(Trail Run)'이라는 걸 한다며 주말마다 나가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이 단어가 뭔가 찾아봤더니, 포장되지 않은 자연 친화적인 산길을 뛰는 아웃도어 스포츠라고 한다.

산을 걸어 올라가는 것조차 힘든 나에게, 하루에 20km 넘게 뛰면서 등산하는 트레일런 동호회 사람들은 '외계인' 같은 존재이다. 물론, 내 남편 포함 말이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참 다양하고 신기하다 싶다.




남편은 결국, 자전거 동호회와 트레일런 동호회의 교집합 친구 1명과 지난 주 목-토요일 일정으로 지리산에 갔다. 근처 산을 뛰어 다니는 그놈의 트레일런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비가 오고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데도 굳이 지리산까지 찾아 간단다.


배낭도 없고, 아이젠도 없고, 심지어 겨울 등산복도 없는데 간다고 신나하니, 기가 차고 코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시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려 남편의 지리산행을 고발(?)했더니, 엄청 걱정하시며 위험한 거 아니냐고 하신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남편에게는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일뿐...

결국 코펠부터 침낭까지 싹 다 빌려 남편은 떠났다. 겨울 지리산으로!


하루에 한 번씩 생사 여부는 알려달라는게 나의 부탁이라, 남편은 중간 중간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으로 보는 겨울 지리산은 꽤나 멋있었다. 그러나 이건 사진으로 감상만 했기 때문이지, 내가 그 현장에 있었으면 걸으며 느끼는 힘들다는 감정이 훨씬 더 컸으리라.


남편과 친구는 새벽 3시에 일어나 15kg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28km를 걸었다고 한다.

미친건가?

내가 이 얘기를 듣고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이거였다... 내 남편은 미친 사람이었구나!!!

운동에 미치고, 산에 미치고, 극한의 도전에 미친 사람 말이다.


아무튼 지리산에 간 남편은, 거지꼴을 하고 토요일 밤 무사히 집에 도착하긴 했다.

10년 넘은 등산화는 뒷꿈치가 찢어져 양말은 눈으로 젖었고, 3일동안 씻지도 못해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생각보다 춥고 힘들었다 말한다.




나는 돌아온 탕아, 나의 남편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아직도 눈에 씌여진 콩깍지. 지리산 종주를 하다니 조금 멋지긴 하네? (사진으로 보면)

두번째는, 어휴, 진짜 사서 고생이다. 이해가 안된다 저 인간.

마지막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고,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


사랑에는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나와 남편의 사랑은 '안정기'인 것 같다.

설렘의 시기는 진작에 졸업했고, 우리는 지금 투닥거리며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되기는 하지만,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최대한 존중해준다.


남편은 조용히 가만 앉아 있는걸 견디지만, 내가 좋아하니 카페도 같이 가주고 서점도 가준다.

나는 저질 체력으로 남편의 취미를 같이 한다는건 상상도 못하지만, 암묵적으로 그의 외출을 허용하며 취미생활을 지지해준다.


돌아온 남편은 이런  눈치를 살살 보며 조심스레 얘기를 꺼낸다.


"나 3월에 히말라야 가도 돼?"


어휴, 머리야. 제발 작작하자 이 인간아...

허리 디스크로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해외여행을 떠난 팀원과, 지리산에서 고생하다 돌아왔지만 히말라야를 간다는 남편. 이 둘의 모습이 비슷하게 겹쳐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내 주위에는 왜 이리 모험심 넘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냐!!!


3월에는 어쩌면 남편의 히말라야 탐방기로 글 한편 쓸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게 된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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