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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an 15. 2024

삶이 무르익으면 보이는 것들

노래의 재발견

지난주 엄마의 생신을 핑계로 강원도에 사시는 부모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금요일 저녁 남편과 딸은 각자 약속이 잡혀 외출하고, 부모님과 나는 집에서 반주를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무래도 흔치 않은 오랜만의 가족 셋 모임이라, 자연스레 이야기는 우리가 함께 살던 나의 어린 시절로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너를 키울 때가 가장 즐거웠다는 부모님의 회상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 갖고 있던 시절의 기억들을 나누었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집을 가득 채웠던 팝송 소리를 추억으로 소환했다.

영어 선생님이었던 아빠는 카세트테이프에 당대의 히트 팝송을 녹음해 항상 집에서 틀어 두셨고, 우리 집 식구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들으며 같이 흥얼거렸다.

카펜터즈의 Close to you, 비지스의 How deep is your love, 나나 무스쿠리의 Why worry 같은 곡들은 하도 들어 외울 지경이었는데, 어린 내 귀에도 감미롭다는 느낌은 들었다.


내가 어린 시절 집에서 팝송을 하도 많이 들어 지금도 7080 팝송은 전주만 나와도 다 맞출 수 있다고 얘기하자, 아빠는 갑자기 엉뚱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너네 엄마는 요즘 나훈아 노래만 듣는다."


엥??? 이게 무슨 얘기이지?

잠시 뇌정지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아빠에게 농담하는 거 맞냐며 몇 차례 물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은 두 분 다 나이 70이 넘도록 트로트를 정말 싫어하셨다.

위에서 나열한 팝송들 아니면, 양희은, 해바라기, 트윈 폴리오 등 잔잔한 포크송 위주로 평생 들어오시며, 라디오에서 트로트가 나오기라도 하면 재빨리 채널을 돌리셨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도 차마 듣기 힘들다고 발걸음을 재촉하셨고, 그나마 미스터 트롯은 하도 친구분들이 재밌다고 해서 몇 번 시청하다 만 딱 그 정도였다.


정신없는 트로트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요즘의 트로트 열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엄마였는데...

심지어 집에서 가끔 클래식 음악을 듣는 시간이 좋다고 말씀하시던 엄마가 갑자기 나훈아 님의 노래를 듣는다니, 확 궁금증이 들어 심경 변화 요인에 대해 물어봤다.


"너도 나이 들어봐. 삶이 무르익어야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어"


엄마는 갑자기 철학적으로 대답하시고, 아빠는 거기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신다.

무려 20년 전쯤 제자로부터 선물 받았던 나훈아 CD를 여태껏 책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가, 작년에 우연히 차에서 처음으로 틀어봤는데 가사가 두 분 마음속에 훅 하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 분이 듣고 첫눈에 반한 노래는 바로 '홍시'라는 곡으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홍시]


- 나훈아 작사/작곡, 2005년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 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도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회초리 치고 돌아앉아 우시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바람 불면 감기 들세라
안 먹어서 약해질세라
힘든 세상 뒤쳐질세라
사랑땜에 아파할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울 엄마가 보고파진다




아빠는 술을 마시며 블루투스 스피커로 나훈아 님의 곡을 연달아 들려주신다.

그러면서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트로트 문외한인 나에게, 나훈아 님은 작사 작곡을 직접 하는 싱어송 라이터라는 정보도 전달하신다.

사실 내 취향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직접 가사를 썼다는 이야기에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진다.


"아빠, 이 분은 대단한 사람 맞는 것 같아."


그의 음악 세계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홍시와 엄마를 추억으로 연결시켜 이렇게 시적으로 풀어낸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래뿐만이 아니라, 테쓰형이라는 노래의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트로트에 무관심했던 나는 테쓰형 짤만 스치듯 봤었는데, 직접 노래를 들어보니 가사가 철학적이고 참 맛깔나다.


그러고 나서 아직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던 나의 글쓰기도 살짝 고백해 보았다.


"내가 글을 써보니까 말이지,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정말 위대해... 글쓰기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말이야!!!"


진심이었다.

이제는 남의 글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아니, 조금 더 꼼꼼히 관찰하고 읽게 된다.

표현법과 문체, 그 사람만이 가진 글의 다양한 색깔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한다.


아빠는 나훈아 님의 노래를 듣고 지난 세월을 돌이켜본다 하셨고, 엄마는 무르익은 인생에서 보이는 것들의 변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말씀하신다.

나는 작가로서 그의 관찰력과 글솜씨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덕분에 오늘의 글감까지 얻어 간다.


글쓰기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참 넓고 깊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노래도 글쓰기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름다운 글에 예쁜 음표를 붙이면 명곡이 되어 사람들을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은 글쓰기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싱어송라이터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며, 그들의 창작에 무한한 응원을 보내본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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