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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Feb 12. 2024

내 제사상에는 와인을 놔주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명절 연휴가 끝나가고 있다.

명절마다 시댁과 친정을 오간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결혼 이전과 이후의 명절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그 이질감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바로 '제사'.

사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댁에서 제사를 경험해, 제사 자체는 익숙하다. 게다가 어린 시절 제사는 평소 못 먹었던 각종 음식, 특히나 곶감을 떠올리게 해 오히려 달콤한 기억이다.


그러나 어릴 적과 다르게 직접 제사상을 차리는 입장이 되어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에서 가끔 시월드나 제사 일화를 발견하는데, 이런 글들을 읽으며 느낀 빡침(?)에 비하면 내가 가진 경험은 병아리가 삐악 대는 정도이긴 하다.

기껏해야 다 다듬어진 재료로 전을 살짝 부치거나, 이미 만들어 놓으신 나물을 제기에 담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사를 준비하고 치르다 보면, 여기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결코 작지 않다.


이 수많은 음식들을 꼭 다 만들어야 하는 걸까? (누가 먹는다고...)

여러 음식을 하다 보면 깜빡하고 빼먹을 수 있는 건데, 왜 뭐라고 하는 거지?

제사의 대상은 시아버지 쪽 조상님들 뿐인데, 시어머니 조상님들은 누가 챙기나?

남자들은 뒷짐 지고 있다가 제사상에 숟가락만 얹는데, 열받는다... 등등등.


내 삶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일부의 제사 문화가 나는 참 싫다.

그렇다고 용기 내서 시아버지께, '올해부터 제사는 지내지 말아요, 아버님'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쫄보다. 남편을 시켜 얘기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럼 남편은 시댁과의 인연을 영영 도려낼 것 같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제발 나에게 그 제사가 통째로 넘어오지 않기만을 속으로 빌어볼 뿐...




명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딸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가 죽으면, 제사상에 꼭 와인을 올려줘."


딸은 '갑자기 엄마가 왜 저런담?'이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자기는 어른이 되어도 와인 안 마실 거라고.

나는 딸의 어이없는 대답에 굴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붙였다.


"엄마는, 내가 죽은 날 네가 너무 슬퍼하지 말고 파티하듯 나를 기념해 줬으면 해.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와인이랑 치즈, 과일 등등 차려 놓고 즐기면서 엄마 생각 잠깐이라도 하게 말이야."


딸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죽기 전 이 말을 해줬으니,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생각나겠지?

평소에 집에서 엄마는 진지하다고 뭐라 하니, 죽고 나서 까지 딱딱하게 기념될만한 추모나 제사는 싫다.

그러나 딸의 인생에서 완전히 잊히는 것도 원하지 않으니, 일 년에 하루 식탁에 와인 한 병 올려놓고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제사상 와인 한 병 주문으로 엄마를 술꾼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이 부분은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예전에 놀이터 같이 다닐 때 맥주를 텀블러에 싸들고 갔다가 딱 걸린 기억은, 아직까지도 딸의 뇌리에 딱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뭐, 알코올은 적당히 섭취하면 정신 건강과 관계 형성에 좋으니, 자기도 크면 알아서 잘 활용하겠지.


내 제삿날 저녁에는, 은은한 조명 아래 재즈 선율이 흘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제사와 와인 한 병을 핑계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따뜻함을 나누는 날을 보냈으면 좋겠다.


제사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컸던 요즘이지만, 내 제삿날을 생각하니 어렴풋이 제사의 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죽고 나서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후손들이라면, 내가 그리워하던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마구마구  떠올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들이 모여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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