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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수풀림
Nov 08. 2023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난 나의 잊어버린 감수성
잠들었던 나의 감수성 찾기
모처럼 가족들과 버스를 타고 주말 서울 나들이길에 올랐다.
목표지는 명동, 광화문, 덕수궁 등 예전에 남편과 데이트 코스로 찾았던 장소들이다.
경기 남부 지역으로 이사 온 이후, 아니 결혼한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업무 출장 외로는 와볼 일이 없었던 장소였다. 멀기도 멀거니와 주말의 복잡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크다.
마침 이번 주말은 날씨도 무척이나 좋아, 11월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20도 안팎의 기온에, 취소된 비 예보와 마지막 절정을 향하는 단풍까지... 하늘이 도와준 느낌이었다.
사실 요즘 지방 출장이나 공항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버스도 타볼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씨에 오랜만에 남편과 사춘기 딸과 같이 놀러 가니, 내 안에서 귀찮음을 이긴 달뜬 기분 덕분에 콧노래까지 나올 정도였다.
처음 버스에서 내려 향한 목적지는 명동.
시간을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남편과 풋풋하게 연애하던 시절이 떠오르는 장소들을 차례차례 훑어갔다.
"아! 그때는 이랬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구나. 혹은 지금도 똑같다니!"라는 감탄사를 남발하며 남편과 즐거운 수다를 즐겼다.
그 시절 우리는 학생이었고 가난해서 데이트 비용이 항상 부족했다.
교통비가 없어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기 일쑤였고 가끔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렇게 맛있었고 사치를 부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명동교자에 가서 1인 1 칼국수에 추가로 먹을 만두를 시키며, 이제 우리가 추가 만두까지 시킬 수 있을 정도로 부자가 되고 성공했다는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여기저기 걷다가, 남편과 딸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덕수궁까지 가보았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덕수궁 돌담길에는 바람에 날리는 노란 은행잎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인파 속을 헤치며 걷다가,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끌려 다 가보니 은행잎 카펫이 깔린 돌담자락에서 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전자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났다.
거리 예술가를 실로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덕수궁 돌담길과 어우러진 멜로디와 정취가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그의 공연에 빠져들며 감상하게 되었다.
그가 이번에 연주한 곡은 타이타닉으로, 익숙한 멜로디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마음이 아릿거리며 눈에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이타닉 주제곡이 이렇게 슬픈 멜로디였다니...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는 이 곡을 이렇게까지 해석하고 연주할 수 있다니...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청중들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덕수궁 돌담길의 이 날의 풍경과 모두 어우러져 쉽게 잊지 못할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연주가와 오랜만에 교감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악에 대한 나의 감수성이었음을 깨달았다.
"아! 나도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
진심으로 연주가에게 감사했다.
그 덕분에 인생에서 미뤄두고 외면했던 진짜 음악을 길거리에서 만난 것 같아서.
물론 이런 나의 깨달음은, 연주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지루함에 못 이겨 나를 부르는 남편과 딸의 "여보, 엄마, 빨리 가자"로 아주 짧게 끝났지만, 그 감정과 여운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 내 마음속의 등불이 되길 원해 오늘의 기록으로 남긴다.
마지막 서울 나들이 코스는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입구에 쓰인 문구가 나를 마구 설레게 했다.
교보문고를 내 집처럼 드나들던 20년 전의 나는 이야기와 소설에 심취했던, 외로움을 책으로 달래며 소설 속 인물과 교감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10년 넘게 자기 계발서만 읽고
있
다가, 다시 내가 그 시절 좋아했던 소설 코너로 발길을 돌렸더니, 책과 서점 안의 공기에서 세상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신작을 사서 가방에 넣고 다시 그때의 나로 돌아간 느낌을 즐겼다.
내가 순수하게 좋아했던 음악과 책을 다시 만난 날...
나는 워라밸과 같은 개념으로 '
현실과 예술의 밸런스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현실은 매일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밥'에 비유되자면, 예술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디저트'가 아닐까.
매일 나는 밥만 먹고사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밥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짓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달콤한 디저트를 오랜만에 만난 이 날은 다른 걱정 근심 다 내려놓고, 한 숟갈 두 숟갈 소중히 음미하며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나의 삶에도, 여러분의 삶에도,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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