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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Apr 17. 2024

스도쿠 중독자로 살아보니...

하다 하다 숫자 중독이라니

스도쿠 : 가로세로가 9칸씩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의 가로줄과 세로줄에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겹치지 않도록 한 번씩 써서 채워 넣는 퍼즐 게임


요즘 내가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스도쿠.

자그마한 네모 칸들에 숫자가 주어지면 그때부터 바로 안 쓰던 두뇌 풀가동 시작이다.

어떻게든 빈칸에 들어갈 숫자의 조합을 만드느냐 바빠진다.

1부터 9까지의 단순한 숫자로만 이루어지는 놀이라니.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명료한가!


10년 전쯤에 우연히 신문 한 귀퉁이에서 접한 스도쿠는 신세계였다.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이 숫자의 나열은 참 재미나게 느껴진다.

9개의 숫자를 겹치지 않고 가로세로 9칸에 다 채워 넣었을 때의 희열감이란!


스도쿠는 아이들 두뇌 계발을 위해서 부모님이 많이들 시킨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순전히 나만 열광하는 마니아 게임일 뿐이다.

아니, 이 재미를 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최근 들어 회사일 때문에 번아웃이 찾아왔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황금 같은 주말에도 밖에 나갈 의욕이 생기지 않아 필수적인 외출 말고는 집에서 흑화 모드로 지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스도쿠가 떠올랐다.

나의 스마트폰 금기 중 하나는 게임이었는데, 그만 스도쿠 앱을 깔고 말았다. 

한 번 게임을 시작하면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절대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하나 까딱으로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재미로 바꿔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름 스도쿠 부심이 있던 터라 앱을 열고 중급자 모드로 게임을 시작했다.

역시나, 이렇게 재미있는 세계가 여기에 있었는데 이제야 시작했다니! 풀기 어려울수록 도전의식이 생기며 10분 안에 한 판 풀기, 레벨 높이기 등의 다음 목표가 생겼다.

한 번 시작한 게임은 내 힘으로 멈추기 힘들었다. 남편이 불러 외출을 하거나 저녁밥을 차리거나 하는 꼭 해야 할 일이 주어져야만 간신히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심지어 남편과 같이 탄 차 안에서도 입으로는 대화하며 머리로는 스도쿠를 풀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지내다가 드디어 찾아온 현자타임.

그렇다. 나는 스도쿠 중독에 빠진 것이었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게임의 세계로 도망가버렸다는 자각이 이제야 들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찾아오는 불안함과 걱정이 너무 커서 잊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도쿠를 하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정신상태였다면, 브런치 글도 쓰고 책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에너지를 끌어 모아 스도쿠를 하고 있었다.




자각 능력은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빠져서 현실 세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도쿠만 하기 전에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을 계기로 중독에 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지 적어본다. 사실 이게 뭐 큰 건가 싶지만 나름의 다짐을 해야만 앞으로 나를 위해 조금 더 시간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1. 내가 중독 상태임을 인지한다

생각보다 이게 쉽지 않았다. 중독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잠깐 하는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잘 들여다보고 왜 자꾸 스도쿠를 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 현실도피가 나의 주된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 자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2. 가족과 지인의 도움을 받는다

가족들에게 내가 다시는 게임을 안 할 거라고 선언해야겠다. 그래야 구속력도 생길 것 같고, 무엇보다도 주말 동안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더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남편에게 내 상태를 얘기한다면, 당장이라도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1번으로 돌아가 내가 어떤 이유로 중독이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중독은 내 의지로만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원인파악을 하고 대책을 같이 마련하면 좋을 것 같다.


3. 도피하려는 그 일을 딱 5분만 해본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나. 나는 그 시작이라는 걸 하기 싫어 질질 끌다가 결국 스도쿠를 핑계로 시작 자체를 안 하곤 했다.

그래서 부담 없는 시작을 위해 게임을 재생하기 전,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그 일을 딱 5분만 먼저 해봐야겠다 생각했다. 그게 책 읽기일 수도, 밀린 빨래 개기일 수도, 이메일 회신일 수도 있지만 일단 시작하면 관성의 법칙으로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다 보니 왠지 답도 알고 있고, 벗어나려는 의지도 있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퇴근길 글감을 위해 유튜브 스도쿠 영상을 우연히 보다가 다른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쪽 세계가 이렇게 넓고 전문적이라니!

스도쿠 잘 푸는 법, 숫자 배열법 등 이 세상에는 스도쿠를 잘하는 것을 넘어 남까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게 놀라웠다.

이럴 거면 아예 전문적으로 스도쿠를 더 열심히 해서 더 잘하면 어떨까 생각까지 들었다.

심지어 지난번 방문했던 대형서점에는 스도쿠 문제집이 아동/육아 부분의 베스트셀러로 분류되어 있기까지 했단 말이다.


아무튼, 전문가의 세계를 기웃거려 보다 이내 마음을 워워 진정시킨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 나는 스도쿠를 좋아하지만 직업으로 삼을 만큼 사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도쿠를 하는 나의 지금 마음은 현실도피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고쳐지지 않더라도, 이렇게 글을 빌어 나만의 다짐을 해본다.

아, 그나저나 지금도 머릿속에서 배열판과 9개의 숫자들이 둥둥 떠다닌다. ㅎㅎ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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