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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un 18. 2024

숟가락 좀 그만 얹어!

날로 먹는 인간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

어렸을 때 종종 친구 집에서 놀다 보면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던지, 금방 날이 어둑해지곤 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이런 경우 친구 엄마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OO이 저희 집에서 저녁 먹이고 보낼게요." 

그럼 우리 엄마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냥 집에 가라고 해도 된다고, 민폐를 끼쳐 어떡하냐며 답하셨다. 우리 엄마의 답과는 상관없이 보통 결말은 친구 엄마의 한 마디로 끝났다. "아유, 뭘요~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건데요." 

한국인의 특유의 정 문화는 밥상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먹는 걸로 야박하게 굴면 안 된다는 오래된 믿음 덕분에, 우리 집에 온 손님을 위해 밥상에 숟가락 하나 정도는 기꺼이 올릴 수 있다.


사실 밥상을 차리려면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력이 들어간다. 

음식 재료를 사 와서 씻고 다듬고 칼질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조리도구와 불을 써서 요리를 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식탁을 깨끗이 닦고, 수저를 놓고, 완성된 요리를 적당한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아야 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를 위해 해무 슨 요리를 어떻게 할지 구상부터가 밥상 차리기의 시작이라 하겠다.  

게다가 밥상을 차리면서 생기는 변수도 처리해야 한다. 머릿속에 상상한 메뉴의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갔는데 제철 재료가 없다면 즉석에서 메뉴 변경도 해야 하고, 요리의 맛이 제대로 안 나면 다른 방법을 마련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손쉽게 사 먹어서 간과하지만, 원래 밥상을 차리는 과정은 이렇듯 머리와 몸, 시간과 노력 모두를 써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어릴 때는 정겹기만 했던 표현인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다'는 말이 부정의 언어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별과제를 하는 대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회사원들이 공감하시리라 생각된다. 차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숟가락만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왜 점점 많아지는 기분이 들까. 밥상은 한정되어 있는데 숟가락 개수는 무한정 늘어나, 원래 누구를 위해 밥상을 차리려 했던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아니, 가끔 밥상을 확 엎어 버리고 시원하게 욕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어제 주간 팀장 회의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각자 팀에서 일어난 일들을 돌아가며 서로 공유하는데, 한 팀장님이 억울함을 토로하셨다. "우리 부서에서 다 해놓은 프로젝인데, XXX TFT에서 자기네가 한 것처럼 이미 보고했더라고요." 

알고 보니 몇몇 우리 팀 동료들이, 처음 뚫은 고객사에 우리 제품을 소개해서 성공 사례를 만드는 중인 것 같다. 까다로운 고객사의 요청에 맞춰 장기간 제품 데모를 해주고, 여러 번 방문하여 실험 조건도 같이 세팅하며 긴밀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분야에서 우리의 인프라가 아직 뒷받침되지 않아, 순전 동료들의 노력만으로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개척하느냐 고군분투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타 부서와 같이하는 TFT(Task Force Team)에게도 노출되며 억울함의 문제가 터져 버렸다. TFT란 무엇인가. 중요한 프로젝트가 생기면 기존의 업무와 상관없이 유연하게 팀을 구성하여 아이디어를 모으고 그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일종의 특별 기획팀이다. 

특유의 개인주의 문화가 있는 외국계 회사라 그런지 오히려 TFT가 더 많다. 그래야 서로 엮여 하나의 큰 목표를 갈 수 있는 계기가 더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한된 인원으로 무언가를 달성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 부서에서 중요하게 진행하고 있는 이번 고객사 신규 프로젝트를 TFT에 좋은 마음으로 공유했는데, TFT 소속 빌런 중 하나가 윗분에게 메일을 쓴 것이다.  TFT에서 이런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며, 이렇게 성과를 내고 있고,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말이다. 

문제는 TFT에서는 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부서에서 100%의 공헌을 했고 TFT에는 공유 차원에서 그냥 알려줬을 뿐이었는데 마치 사실처럼 왜곡되었다. 그리고 그 빌런은 윗분으로부터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칭찬의 메일 루프에 끼어 있는 우리 부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고... 우리 부서와 같이 진행하고 있다, 혹은 우리 부서에서 많이 기여하고 있다는 한 줄만 이메일에 포함했더라도 이렇게까지 열받지는 않았을 텐데 심하긴 했다.


이 주제를 꺼낸 이후 팀장 회의는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기' 공론으로 흘러갔다. "TFT 뿐만이 아니라 옆 부서 누구도 그렇고, 글로벌팀 누구도 그렇더라"라고 누군가 한마디를 하면 여기저기서 옳다구나 하고 각자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생각보다 숟가락을 얹는 사람들은 많았고, 다들 이 얘기를 들으며 의욕이 계속 꺾이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심지어 숟가락 정도가 아니라, 국자를 얹거나 밥상을 통째로 가져가버리는 사례도 공유하면서 분위기는 더 과열되었다.


듣는 나도 엄청나게 억울한 마음이 들고 공유하고 싶은 사례가 아주 많았지만, 이러다가 회의가 영원히 안 끝날 것 같아 질문을 슬쩍 던져 보았다.

"숟가락 얹는 인간들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차피 어느 회사, 조직이나 무임 승차자들은 많고 한 명씩 걸러내기 힘들다. 눈에는 눈, 빌런에는 빌런. 당하고만 있을 수 없으니 아이디어를 모아 본다.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린다, 고객사와 회의를 잡은 후 나는 쏙 빠지고 빌런만 참석하게 한다, 내가 먼저 상사에게 보고 이메일을 쓴다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모두의 공감을 샀던 의견은 '그들과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자'이다. 

결국 숟가락 얹는 인간들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는, 월등한 실력으로 밥상은 내가 직접 차렸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밥상 메뉴를 구상하고 있는 과정부터 일부러 공유하고, 밥상 차리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끼려는 빌런들에게 각자 감자 깎기, 끓는 물에 데치기, 간 맞추기 등의 업무를 오히려 주는 것이다. 밥상에 끼는 것을 차단할 수 없다면 일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못 해내면 그것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다 보면 과정에서는 쏙 빠지고 마지막에 금수저 하나 가져와서 다 퍼먹는 인간들은 꼭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럴 때는 각자의 공헌도를 측정할 수 있는 KPI를 마련해 주면 좋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사람들은 이런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상사에게 해당 내용들을 공유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상사도 인지하고 우리 부서에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슬쩍 흘릴 수 있으니 말이다.


무임승차자는 동료들의 정신 건강과 동기 부여에 악영향을 끼친다. 

주위에 무임 승차자가 보이면 버스 기사님께 꼭 이르자. "저 사람 돈 안 내고 탔어요~~~~". 

제발 버스 기사님께서 그 사람을 발로 뻥 차서 내리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이 글을 얼렁뚱땅 마친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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