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글감이 되는 순간
어휴, 또 줄줄이 야근 당첨이다.
분명 오후 3시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칼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있었더랬다. 오전에 있던 긴 회의가 취소되어 쾌재를 부르며, 오늘까지 마감인 업무들을 대충 해놨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 소처럼 일하고 살 거라는 나의 운명은 피해 갈 수 없었나 보다. 5시부터 다른 회의가 잡혔다. 사장님이 요청한 긴급 지시사항으로, 내일 오전 만날 고객사 회의 자료를 수정하라고 하신다. 엄밀히 말하면 수정이 아니라 전면개편? 쯤 되겠다. 또 뭐가 맘에 안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다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내일 오전까지 필요한 자료는, 본인이 오늘 중으로 검토하셔야 되기 때문에 타임라인은 늘 그렇듯 ASAP, 즉 당장이다.
5시에 시작한 회의는 6시가 넘어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슬슬 배는 고파오고, 아이디어는 고가나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9시에는 집에 갈 수 있을까 계산해 보는데, 딱 봐도 글렀다. 같이 회의를 하고 있는 동료들도 다들 지쳐 보인다. 최강 보스가 시킨 거니 안 할 수도 없고, 대충 해서 제출했다가 간 '다시 해와!'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섭다.
이왕 늦은 거 저녁이나 시켜 먹으면서 일하자고 제안했다. 사람이 다 밥심으로 사는 건데, 저녁도 굶으며 일하면 불행할 것 같다. 실은 이번 주 점심, 저녁 모두 회의실에서 미팅을 하며 밥을 먹긴 했다. 동료들도 바쁘고 나도 바빠 회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식사시간과 겹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럴 때마다 배달앱을 하도 많이 이용해, VIP 혜택을 받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3일 내내 회사에서 일하며 밥을 시켜 먹으니 철창 안에 같인 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떨칠 수 없다.
밥을 먹으며 푸념 섞인 고충을 서로 주고받는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렇게까지 회사를 다녀야 되나라는 공통된 감정을 느낀다. 한참 신세타령을 하다 보니 약간씩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오호라, 이거 내일 글감으로 써야겠는데?'
이 와중에 글감을 찾다니 웃기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야근을 끝내려면 자료부터 만들어야 되는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글감으로 떠오른 생각을 놓치기 싫어 남들 몰래 얼른 메모장부터 열었다. 모든 느낌을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연상되는 단어 하나라도 더 적어본다. 생생하게 펼쳐지는 당장의 순간은, 잠 한번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기억에서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만한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아니, 내 기억력이다. 그러니 생각날 때 부지런히 메모를 해놓는다.
회사에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은, 직장인에게 스트레스라는 만병의 근원을 안겨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하며, 퇴사라는 행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나는 꽤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 내 탓 같았고, 나를 괴롭히기 위해 생기는 일 같았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잠을 자며 도망가거나, 끊임없이 그 생각을 하며 자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글쓰기를 알게 되고 나서는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나의 자세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스트레스 상황을 글로 풀어내며, 상황 자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왜 불안하고 화가 났는지, 도망가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퇴사를 외쳤는데, 글을 쓰다 보니 퇴사가 모든 스트레스의 정답은 아니란 사실도 깨달았다. 스트레스 상황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개인의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었다.
웃긴 건, 요즘에는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생기면 대부분 글감으로 연결시킨다는 사실이다.
팀원이 구급차에 실려갔을 때, 들리지 않는 영어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을 때, 단물만 쪽쪽 빨아먹는 빌런을 만났을 때 등 모든 순간이 글감이 된다.
글 쓰시는 분들은 모두 공감하리라. 글감 찾기란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반대로, 글을 계속 쓰다 보면, 글감은 강가의 조약돌처럼 바로 옆에 놓여있는 걸 발견할 때가 많다는 사실도 말이다. 조약돌을 허투루 여기지 않고 보물처럼 잘 닦고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쓸만하다. 그냥 회색의 작은 돌이 아니라, 햇빛에 보면 살짝 반짝이는 보라색이 되기도 하고, 똑같은 동그란 모양인 줄 알았는데 약간 우주선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글감이 되는 과정인 것 같다.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는 스트레스를 조약돌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돌이 무겁고 보기 싫어 강물에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조금씩 그 돌을 들여다보고 내가 원하는 색을 칠하고, 모양을 다듬으면 나만의 글감이라는 보물이 되기도 한다. 글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오늘도 크고 작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로 스트레스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외치며 정신승리를 해본다.
'이것도 언젠가 글감이 되겠지, 앗싸! 오늘도 글감 발견이요~'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