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풀림 Aug 09. 2024

수박달이 뜨는 우리 집 여름 풍경

수박 없는 여름은 상상할 수 없다고!

수박을 빼놓고 여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수박이 있는 여름과 그렇지 않은 여름은 천국과 지옥만큼 큰 간격이 있을 것이다. 달덩이처럼 큰 수박 한 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손은 무겁지만 마음은 무척 가볍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들의 손에 달린 창과 방패 같은 무기가 바로 여름철 수박이다. 이 수박 한 통이면 무더운 여름 더위도 그럭저럭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샘솟고 마음이 안정된다. 시원한 수박 한 입 크게 베어 먹으면, 더위라는 놈은 나와 싸워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도망가버릴 것 같다.

 

이글거리는 태양도, 꿉꿉한 장맛비도, 심지어 신나는 물놀이도 싫어하는 내게 여름은 가장 피하고 싶은 계절이다. 더워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갓 파마한 머리는 부스스해지며, 더위를 견디다 못해 에어컨을 틀어 놓으면 금세 춥고 건조해진다. 얼마 전까지 이제 막 피어난 봄 꽃을 보며 산책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집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다. 선선한 가을이 얼른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반대로 이 더운 여름을 열정적으로 즐기며 사랑하는 남편 같은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일찍 뜨는 해를 보며 새벽 운동을 나가, 동호회 사람들과 자전거를 100km씩 타고 온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피부가 시커멓게 그을려도, 바깥 운동을 실컷 할 수 있는 여름을 기다리며 아이처럼 신난 얼굴이다. 역시 화성에서 온 남편이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더위를 피하러 종종 물놀이장을 가곤 했는데, 자기가 더 신나 하며 미친 듯이 놀았다. 지친 내가 집에 가자고 아무리 말해도, 남편의 즐거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항상 여름철 워터파크 나들이는 나의 기피대상 1호였다. 

 

여름에 대한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수박’이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크게 바뀌지 않은, 손잡이가 달린 노끈 같은 것에 수박을 담아주면 낑낑거리며 집으로 짊어지고 온다. 이 큰 수박을 어떻게 잘라, 어디에 놓아두며, 어떻게 다 먹지라는 걱정은, 수박을 살 결심을 하는 순간마다 하는 의례적 행사이다. 

“내가 다 할 테니 당신은 걱정하지 마”라고 늘 나를 안심시켜 주는 남편에게 이 모든 뒤치다꺼리를 맡기고 쉬려고 하면, 남편은 그때마다 코를 골고 먼저 잠을 자고 있다. ‘으유~~, 이 인간 그러면 그렇지’라고 푸념을 하며 냉장고 한편을 다 치우고 넣어 놓은 수박을 꺼내 놓는다. 시원한 냉기를 기분 좋게 느끼며 수돗물에 샤워를 시켜주고 도마로 옮긴다. 

 

수박은 첫 칼질이 정말 중요하다. 

집에서 가장 큰 칼을 골라 동그란 수박을 잡고 칼질을 하다 보면, 내 힘으로는 자꾸 부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타조알처럼 생긴 수박이 데구르르 굴러 도망갈까 봐, 칼이 끝까지 안 들어가 수박이 안 잘릴까 봐 긴장된다. 조금씩 수박을 굴려가며 칼을 요리조리 아래로 움직이다 보면, 마침내 성공을 알리는 축하의 소리가 들린다. 

“쩌어어어~~~~ 억”

첫 칼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잘 익은 수박이 잘릴 때의 팡파르이다. 진한 초록색에 까만 지그재그 줄무늬를 입고 있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살은 빠알갛고 초콜릿 같은 씨앗도 콕콕 박혀 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가장 가운데 맛있는 부위를 조금 잘라내어 맛을 본다. 서걱서걱, 추압추압, 줄줄줄… 

 

“딸내미, 나와서 수박 먹어~~~”

수박을 잡는 이 순간만 즐길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호프집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양의, 세모난 모양의 수박을 껍질이 붙어 있는 채 먹어보는 것이다. 큰 수박은 보통 깍두기처럼 썰어 밀폐용기에 넣어 두고 먹는다. 단지, 보존을 위해, 멋을 포기한달까.

그러나 수박을 처음으로 써는 순간에는 요리사 마음대로 아무것이나 할 수 있다. 딸을 위해 화채 모양으로 동글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쿠키틀로 찍어 별모양도 만들어준다. 아이가 큰 지금도 내가 수박을 써는 순간만큼은 옆에 서서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며 조잘조잘 말을 한다. 안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남편이 얄밉다가도, 엄지 척하며 배를 두드리며 수박을 먹는 딸을 보면 무한 보람이 느껴진다. 


그렇게 주방에서 서서 둘이 수박을 먹는 밤은, 시원한 바람이 불고 예쁜 별이 반짝거린다.

어느새 우리 집에는, 여름을 환히 밝혀주는 동그랗고 커다란 수박달이 떠오르고 있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