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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Oct 09. 2024

영어 안 쓰기 내기

한글날 특집

딸내미가 예닐곱 살 때부터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즐겨하는 내기가 있다.

일명 '영어 안 쓰기 놀이'. 휴일이나 주말,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하거나 산의 오르막 길을 걸을 때면 아이는 무척이나 지루해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이럴 때마다 힘들고 심심하다 칭얼댔기에, 우리 부부는 아이가 흥미를 보일만할 놀이를 계속 만들어내야 했다. 아이가 즐거워야 엄마아빠도 덜 힘들기에 말이다.

"음~~~ 아빠가 생각한 게 있는데 한번 들어봐. 아빠가 첫 글자를 말하면 너랑 엄마랑 한 글자씩 이어서 단어를 만드는 거야. 연습 한 번 해보자. 만약 아빠가 '소'라는 글자를 말하면 너는 다음에 뭘 말해야 되지?"

그럼 아이는 소나무나 소나기, 소금빵 등을 연상하며 그다음 글자를 말하곤 했다. 단어 조합으로 신나게 놀이를 하다가 소재가 슬슬 떨어져 가고 지겨워지면, 배스킨라빈스 31, 끝말잇기, 아이엠 그라운드, 쿵쿵따 등의 게임을 돌아가며 이어갔다. 하지만 아이는 늘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고, 엄마 아빠의 창의성과 뇌용량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먼저 놀이 제안을 했다.

"세종대왕님이 오늘 한글 만들었다고 했지? 그럼 우리 오늘은 영어 안 쓰기 게임해보자."


마침 그날은 한글날이었나 보다. 

유치원에서 배웠는지 세종대왕님을 언급하는 아이가 귀여웠고,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낸 것도 기특했다. 여기에 덧붙여 승부 내기까지 하자고 했다. 산책이 끝나면 꼴등은 아이스크림을 사고, 2등은 꿀밤을 맞는 내기였다. 매일 쓰는 게 한국어고 한글인데 뭐가 어려울까 싶어 호기롭게 시작하자고 외쳤다. 특히나 남편은 자기가 1등 하면 편의점에서 파는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라며 벌써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

시작 구호와 함께 다들 무슨 말을 할까 고민을 하느냐,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 함께 푸하하 웃으며 다시 규칙을 만들었다. 아무 말도 안 하면 벌점 1점씩 추가. 그래서 다시 시작된 놀이 겸 대화는 늘 하던 평범한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늘 저녁 외식 메뉴 뭘로 할까?"

그날은 산책을 하고 나서 맛있는 걸 사 먹기로 했었지만 아직 무엇을 먹을지 정하지 않았다. 말을 안 하면 벌점이 추가되니, 일부러 남편과 딸에게 말을 붙였는데 그 둘은 갑자기 자지러졌다. 

"앗싸~~~ 크하하하하핫~~~~ 엄마 1점!"

영문을 모르는 나는 도대체 왜 1점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늘 쓰던 저녁 메뉴라는 단어에도 영어가 포함되어 있음을... 아니, 메뉴 대신 무슨 단어를 써야 되지? 대체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 음식 종류 고르기? 혹은 오늘 저녁은 뭐 먹을래? 이렇게 말했어야 되나' 짧은 시간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첫 벌점을 황당하게 받아 억울한 마음이 드니, 잔머리가 막 굴러갔다. 

'요것들을 어떻게 영어를 쓰게 만들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우선 남편을 공략했다

"여보, 이따가 당신이 이기면 편의점에서 뭐 얻어먹을 거야?"

마침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며 찡찡대서, 남편이 업고 안쓰럽게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중이었다. 힘든 와중에 내가 낚싯대를 던지니 생각 없이 덥석 미끼를 물면서 대답했다. 자신은 OOO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라고. 나는 그의 최애 아이스크림을 이미 알고 물어봤던 거였다. 다만, 질문 자체에 아이스크림이라는 영어 단어를 쓰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해야 했다. 도대체 아이스크림의 한국어는 뭘까 또 고민하면서 말이다. 북한말로 얼음보숭이라고 해야 되나, 서양 얼음이라고 해야 되나...

업혀 있던 딸은 아빠의 실수에 신나게 웃다가 제어가 안되는지, 남편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깔깔댔다. 심지어 너무 웃겨서 다리가 안 아프다며 내려달라고 했다. 엄마 벌점 1점, 아빠는 초코와 아이스크림 두 단어나 영어를 썼으니 벌점 2점. 자기가 일등을 하고 있으니 다시 걸을 힘이 났나 보다. 반면 남편은 어이없고 분한 표정으로 전의를 다졌다. 경쟁심에 불타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온갖 술수와 음모, 함정이 난무하는 유도 신문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이도 내가 했던 질문을 응용해서 아빠에게 물어본다. 일단 아빠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얘기를 막 하다가, 눈치 못 채게 슬쩍 끼어서 질문을 했다. 아빠가 밤마다 즐겨 보던 그거 뭐지? 라면서 물어봤는데, 홀라당 넘어간 남편은 아이가 자기 취향을 알아봐 줘서 고마웠는지 침을 튀기며 대답했다. 

"아, 유튜브 OOO 콘텐츠? 그거 아빠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쯧쯧쯧.... 일곱 살 아이한테 당할 만큼 이렇게 순진해서야. 이번에도 두 단어나 영어를 썼다. 벌점 2점 추가 확정! 꼴등 확정!

열받은 남편은 나랑 아이에게 무차별 공격을 이어나갔고, 먼저 아이가 걸려들었다. 아빠랑 대화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바나나, 텔레비전 등의 단어를 써서 대답한 것이다. 절대 영어를 쓰지 않겠다고 의식을 하면서 방어하고 있던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마트폰, 프라이팬 이런 단어가 절로 튀어나왔다. 남편도 질세라 게임, 오케이 등을 쓰며 점수는 막상막하. 결국 한 시간가량 걷는 멀지 않은 산책길에서, 영어를 안 쓰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0개가 넘는 단어를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영어는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아 의식하지 않으면 내가 쓰고 있는지조차 인지하기 힘들었다.


어느 한글날 딸이 만든 우리 가족의 '영어 안 쓰기 놀이'를 통해, 그동안의 언어습관을 돌아본다. 

언젠가 브런치 글에도 고백한 적이 있는데, 외국계 회사에 오래 다니다 보니 내가 회사에서 쓰는 단어의 70프로 이상은 영어이다. 쉬운 단어도 굳이 영어로 말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선적을 shipping으로, 마감일을 deadline 등으로 말이다. 업무 용어라 익숙해서 그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영어를 쓰고 있다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영어 안 쓰기 놀이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영어를 인식하는 습관이 생겼다. 하도 그 내기를 많이 하다 보니, 식탁에서 영어 단어를 쓰다가 나도 모르게 흠칫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게임 중인 줄 알고 말이다.

"엄마가 내일 파스타 해주려고 하는데, 토마토 파스타가 좋아, 아니면 크림 파스타가 좋아?"

만약 내기 중이었다면 파스타, 토마토, 크림 세 번이나 썼으니 벌점 3점 추가다. 그러나 파스타 대신 서양 국수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난감하다. 토마토를 대체 어떤 한국어로 대체해야 할까. 아직까지도 한국어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나의 국어 실력이 예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다면 그건 두 가지 영향 때문이라 결론을 내본다. 

하나는 '영어 안 쓰기 놀이' 때문에 대화에서 국어를 많이 사용하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글쓰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마다 단어 사용에 한계를 느껴 국어사전을 뒤적거리다 보니, 단어의 뜻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다양한 국어 어휘를 사용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어휘의 풍부함이 나의 사고를 확장시키고, 대화를 더 맛깔나게 만들어줌을 확신하기에.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기에 말이다.

한글날 특집으로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다가 왠지 삼천포로 빠진 것 같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말을 잘 활용하는 그날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오겠지.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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