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추억은 오래 남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각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같은 경험'을 공유한 추억은 가장 강력한 후보가 아닐까. 주말 우리 집 식탁에서 제일 공감을 사며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주제도 역시 '같은 경험'이다. 각자의 경험을 나눌 때는 흥미롭게 듣다가도 '그렇구나'로 금세 끝나는 반면, 우리가 다 같이 함께했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너무나도 신나게 침을 튀기며 말을 이어가게 된다. 작년 가을 무렵 집 근처 나지막한 산에 갔다가 길을 잃을뻔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다. 가족과는 웬만해서는 같이 외출을 하지 않으려는 사춘기 딸을 간신히 꼬셔 산을 오를 때였다. 남편의 주체할 수 없는 외출에 대한 열정과, 나와 딸의 저질 체력은 늘 상충했다. 그는 이왕 산에 왔으면 꼭대기까지 가자고 말했고, 이미 초반 오르막길에 지친 나머지 사람들은 온몸으로 이를 거부했다. 어떻게든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싶은 남편은, 맛있는 음식으로 살살 꼬드겼다. 연어초밥이었는지 혹은 감자탕이었는지 메뉴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남편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 우리는 걷고 또 걸었지만 도대체 정상은 어디인지 가늠도 안되었고, 너무 지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중도 포기를 외쳤고, 남편은 그제야 알았다고 하며 멈추었다.
빨리 하산하고 싶어 왔던 길로 몸을 돌렸지만, 그는 자신만 믿으라며, 더 빨리 내려가는 지름길을 안다고 했다. 나와 딸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남편을 쳐다봤다. 그놈의 지름길 타령에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살 무렵 뾰족구두를 신고 데이트를 할 때도, 그는 이 길이 빠르다며 나를 이상한 산길로 안내한 적이 있다. 걸어도 걸어도 큰길은 나오지 않았고, 흙길을 하이힐로 걷다가 결국 구두굽이 부러지기까지 했다. 길바닥에 앉아 엉엉 울며 그를 원망하다가, 결국 얼마간은 업혀서 내려온 것 같다.
아무튼 큰소리 떵떵 치는 남편에게 이번 한 번만 더 속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길치라 왔던 길 말고는 다른 길을 모르기도 했고,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라? 그러면 그렇지. 가도 가도 여기가 어딘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데자뷔도 아니고, 점점 더 산속 미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딸도 '아빠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다리는 천근만근, 머릿속은 의심 가득. GPS를 켜봤지만, 결국 걸어서 이 길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맞닥뜨렸다. 다행히도 걷다 보니 주차장이 나왔다. 그날의 경험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우리 집 식탁에 오른다. 남편의 '이제 다 왔어'라는 말에 대한 불신과, 가족들의 불평은 재미난 안주거리다. 우리 가족만이 추억하며 웃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랄까.
이런 '같은 경험'에 대한 추억은 비단 가족 구성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친구들을 만나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한참 묻다가도, 결국 마지막에 가장 즐겁게 하는 이야기는 바로 '같은 경험'이다. 특히나 대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면 궁금한 이야기들이 많다. 몇 년 전 출산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 그 아이는 몇 살인지, 힘겹게 워킹맘을 한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등등. 그러다가도 누군가 추억 버튼을 누르면, 그 순간 우리는 같은 경험을 나누었던 20살 무렵으로 함께 되돌아간다. 기말고사 전날 술을 퍼먹고 시험에 못 들어가 다 같이 F학점을 사이좋게 맞았던 기억, 누군가의 고백 현장에 참석해 설레었던 추억 등등을 얘기한다. 신입생 시절 농활에 가서 선배들 몰래 담배를 나누어 피며 콜록댔던 우리의 첫 흡연 경험도, 단골 회상 멘트 중 하나이다. 체력은 전만 못해 밤새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그때 같이 나누었던 우리의 술잔만큼은 또렷이 추억한다. 그리고 같이 했던 그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각별한 사이라고 느낀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색한 회식 자리에서 단골 안주는 바로 '회사 워크숍' 이야기일 것이다. 다 같이 갔던 워크숍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져와 밤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동료와, 그와 함께하며 다 같이 옛날 유행가를 부르던 기억. 집에서 가져온 비싼 위스키 한 병이 금세 떨어지자, 위스키 병에 소주를 타 '발렌타인' 대신 '소렌타인'이라고 이름 붙이며 마시라고 했던 기억. 평소에는 표정 없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부장님이 만취해, 누군가에게 실려가며 주정을 했던 이야기 등등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가 다 같이 경험했던 기억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 경험을 함께한 사이이기에, 조금 더 끈끈하다고 느낀다. 없던 동료애가 마구마구 샘솟으며 친밀감이 들기도 한다.
같은 경험을 나눈 사이는, 각별하다.
그 시간과 공간에, 나와 그 순간 함께한 사람이 함께 나눈 경험이라 그렇다. 경험을 나누면 추억이 되고, 추억을 회상하는 동안 친밀감이 샘솟는다. 동질감이 느껴지고, 말하지 않아도 공감이 팍팍 된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경험이라고. 더군다나 여기에 '같이 한 경험'이라면 더 특별하지 않겠는가. 함께한 경험만큼, 함께한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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