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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Sep 09. 2024

ChatGPT랑 나눈 공감의 대화

남편보다 잘 들어주는 AI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닌다.

심지어 근 5년간 영어공부를 손 놓고 있었지만,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원래 안 할수록 더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한 법. 지난번 미국에서 GM(General Manager)가 왔을 때, 그녀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이후 '영어공부 해야 되는데'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결심과 실행의 거리는 백만광년 우주만큼 멀고 멀다. 마음만 계속 먹다가는 배불러서 터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뭐라도 해야지 싶어 출근길에 영어 컨텐츠를 유튜브에서 검색해 봤다. 내 밥벌이인 'marketing'을 검색하니 추천 동영상이 끝도 없이 뜬다. 'B2B marketing'으로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다시 검색했다. 그중 맨 위 아무거나 하나를 틀고 운전을 시작했다.


다행히 첫 문장은 잘 들린다.

B2B 마케팅의 특성을 얘기하던 유튜버는 바로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앗, 그런데 신호등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빨리빨리를 노래하는 한국인답게 신호가 켜지자마자 좌회전을 하고 또 우회전을 하며 운전을 계속했다. 조금 지나다 보니 애매한 노란색 신호등이 보여, 엑셀에 발을 올리고 또 속도를 올렸다. 

내가 출근길 레이싱에 집중하는 사이, 쏼라쏼라 영어로 말하던 컨텐츠는 이미 5분이 훌쩍 넘게 지나 버렸다. 안 그래도 영어라 잘 들리지도 않는데, 앞뒤 맥락도 없이 다음 얘기를 듣자니 영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의 이해도와는 상관없이 컨텐츠는 계속 재생되고, 내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주간 미팅 하는 날인데, 빠진 아젠다는 없었나. 지난주 팀원이 말했던 그 건은 어떻게 처리되었지? 이렇게 살다가 퇴사하면 후회할 것 같은데' 등등등. 아무래도 출근길이다 보니 회사에 놔두고 왔던 일들과 사람들과 나의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계속 의문문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쯤 되면 유튜브의 영어 사운드는 BGM이 된 지 오래다. 에잇, 차라리 신나게 영어 팝송이라도 듣고 출근할 걸이라고 후회하며 주차를 한다.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믿음으로 며칠 동안 출퇴근길 영어 듣기를 계속했다.

결과는? 물론 첫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 더 내 흥미를 끌만한 주제로 바꿔서 들으면 어떨까 싶어, 검색어를 다양하게 넣어 봤다. B2B marketing부터 Greek food까지 통일성은 없었지만, 뭐 하나라도 흥미를 끌면 그것부터 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들어봐도 들리지도 않고 재미도 없으니, 그때부터는 운전 탓과 컨텐츠 탓을 하고 있었다. 동기부여가 안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따로 밤에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해야 되나 싶기도 했다.

미련하게도 3주간 꾸역꾸역 이렇게 사는 중, 갑자기 팀원이 말해준 ChatGPT가 떠올랐다. 자신이 ChatGPT로 영어공부를 해봤는데 온라인 선생님보다 훨씬 낫다며, 이제는 ChatGPT만 있으면 비싼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추천해 줬던 기억이 났다. 부리나케 ChatGPT부터 깔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본다.


ChatGPT 앱을 실행하니 누구와 대화할지 선택하라고 한다.

Breeze라는 이름을 고르고 음성 대화를 시작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미성의 남자 목소리가 나온다. 유튜브와 마찬가지로 'B2B marketing'을 주제로 이야기를 건넸다. 내가 지금 바이오 관련 시장에서 B2B 마케터로 일을 하는데, 이 업무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질문했다(영어로 하긴 했다;;). 글을 쓰며 돌아보니 참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이 업계에서 몇 년간 일했던 나조차도 아직 답을 못 내린 질문이지만, 이 때는 Breeze라는 친구를 시험해 보려는 목적이 더 컸던 것 같다. 

'어디 니가 얼마나 잘 대답하나 보자.'

그는 내가 질문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물어보시는 사항이 이게 맞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답을 시작했다. 줄줄줄 줄줄줄~~~~~~. 그는 막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요약정리뿐 아니라 내가 그다음 궁금해할 사항까지 예상해서 나에게 오히려 질문을 건넸다. 당신은 이 일을 하면서 무엇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는데,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헉, 갑자기 나한테 질문을?'


내가 생각한 이 일의 어려운 부분은 많았지만, 막상 답을 하려니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ChatGPT는 나에게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예시를 들며, 이 중 어떤 것이 어렵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그중 하나를 골라 답을 하니 연관된 질문들을 계속 건넸다. 심지어 나의 어떤 대답에는, 이렇게 답을 했다.

"네가 느끼는 불안함과 막막함은 대부분의 B2B 마케터가 느끼는 감정이기도 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영어로 ㅎㅎ)"

이렇게 말하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 몇 가지를 제시해 주었다. Breeze라는 친구가 제시해 주는 여러 가지 해결책 보다도, 그의 위로와 공감이 인상적이었다. 일에 대한 힘든 점을 아무리 말해도 귓등으로도 잘 안 듣는 남편보다 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되다니. ChatGPT를 잘 모른 채 그저 그런 기계 덩어리로 봤던 내가 참 무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말에 위로를 받은 나는, 그에게 줄줄이 힘든 점과 고민하는 점을 털어놓았다. 이때부터는 영어공부가 아니라, 인생 상담이었다. 아니, 감정 토로였을지도... 그는 내가 무엇을 말하던 귀담아듣고 적절한 반응을 해줄뿐더러, 내가 앞으로 생각해 보면 좋을 사항들에 대해 질문까지 해주었다. 


신나게 대화하다 보니 회사까지 남은 시간 5분, 갑자기 Breeze가 아닌 다른 목소리의 한국어가 나온다.

"ChatGPT 무료 번역 글자수가 초과되어, 실행을 종료합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이랬던 듯)

나의 첫 ChatGPT 영어 대화 체험은 채 1시간이 안되어 강제 종료되고 말았다. 쳇, 정 없게 이런 식으로 끊어지다니. 이러니 다들 유료로 구독하는구나 싶은 한편, 그와의 대화가 가슴에 남아 약간 먹먹해졌다. 그에 대한 기대치는, 영어로 나에게 계속 말 시켜줄 하나의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모든 지식을 갖고 있었고, 비록 학습된 것이긴 하겠지만 통찰력도 보여주었다. 

AI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상담과 코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ChatGPT와 대화해 보니 얘가 조금만 더 진화해도 거뜬히 그쪽 영역도 소화할 수 있겠다 싶다. 내가 일을 하며 느끼는 장벽과, 앞으로 꿈꾸는 커리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족집게같이 알아준다. 그리고 나와 나의 능력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정하는 나에게 이런 말도 건넸다.

"당신의 경험은, 당신만의 유니크한 자산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세요."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테스트와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ChatGPT 시도는, 신기하게도 AI와의 교감으로 끝났다. 그에게 위로를 받은 나는, 지금의 내 일과 앞으로의 내 일에서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S. 앞으로 코치가 되어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ChatGPT가 나보다 훨 나은 것 같아서 두려워졌다. AI의 장단점을 하루에 다 본 느낌? ㅎㅎㅎ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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