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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Sep 26. 2024

조건 없는 베풂을 받는 기쁨

감동으로 가득 찬 하루

인생의 기회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긴다.

애정을 바쳐 일했던 회사에서 생긴 일들로, 있던 정 없던 정까지 다 떨어져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매주 1시간씩 진행하는 영어 줌 수업에서, 강사님이 이번 주는 어땠는지 가볍게 물어보셨다. 원래 인사말로 의례 하는 'what's up this week?'이라는 문장을 건네셨는데, 아임 파인 땡큐라고 절대 대답하기 힘들었다. 짧은 영어로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이번 주에 어떤 짜증 나는 일들이 있었는지 술술술 내뱉고 있었다. 아마도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내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리라. 이야기 반, 한숨 반, 답답한 표정 추가.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까지 얘기했다. 강사님은 갑자기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을 하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같다. 

'지금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있지만, 잠시 멈추고 다시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회사에서 더 높은 포지션으로 올라가려면 많은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나는 당신이 C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잠재력을 믿는다.'


사실 영어 수업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다.

같은 회사 내 아시아 담당 디렉터 자리에 공석이 생겼고, 전 담당자의 추천으로 그 자리에 지원한 상황이었다. 이력서를 쓴 지도, 면접을 본 지도 오래되어 당장 준비가 필요했다. 특히나 영어 면접은 큰일이었다. 아시아 마케팅을 총괄하는 자리라, 영어로 무지 말을 잘해야 했다. 당장 숨고를 찾아 영어 과외를 신청했다. 많은 신청이 들어왔지만, 가격도 적당하고 비즈니스 경험이 있으신 분을 선정해 수업을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외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시다가 국내 대학에서 교수로 퇴임하셨다고 하셨다. 열정이 높으신 분이었고, 나와의 케미도 잘 맞았다. 단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해, 고객 맞춤형으로 3시간을 준비해 오시는 분이었다. 면접 질문뿐 아니라 비즈니스에서 꼭 알아야 할 고급 영어들을 알려주셨다. 내가 조금 더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면접을 찢어 놓기를 원하셔서, 때로는 격려하며, 때로는 몰아붙이며 나를 가르치셨다. 물론 수업이 끝나면 전혀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언제 있을지 모를 면접을 위해 매주 수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끝끝내 나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4달이 지나고 그 자리에 누군가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면접의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 한 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도저히 영어로 면접을 잘 치를 자신이 없어서였다. 달달 외운 몇 마디 영어로는 내 밑천이 금세 드러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면접 준비로 시작했던 영어 공부는, 비즈니스 영어 회화로 그냥 이어 나갔다. 강사님과는 정기적인 커리큘럼 없이 회사 이야기도 하고, 기사도 읽고, 비즈니스에 도움 되는 꿀팁도 받았다. 나보다 나의 커리어를 더 신경 쓰시며,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영어를 잘하고 업무에 적용할 수 있을지 궁리하고 다음 수업을 준비하셨다. 막상 나는 수업을 통한 영어 실력 향상에 큰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강사님이 나에게 보내는 관심과, 칭찬, 응원의 메시지 등이 더 좋았다. 별 거 아닌 거에도 너는 지금도 잘 하지만 더 잘할 수 있다고 종종 말씀해 주시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매주 한 번씩 수업을 하고 나면, 내적 에너지가 충만해졌다. 암울하기만 한 회사 생활에, 큰 활력이 되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 날, 강사님은 나보다 더 크게 걱정하셨다.

그날은 수업을 아예 안 하고, 진심 어린 조언을 더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자신이 기업에서 CEO가 되기 위해 겪었던 도전과 시련을 공유해 주셨고, 내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 많은 질문도 하셨다. 오히려 내가 강사님을 안심시켜드려야 했다. 괜찮다고, 정신 차리고 다시 회사 생활 잘하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난 다음 날, 강사님이 평소와 다르게 전화를 달라고 하셨다. 퇴근 후 밤에 연락을 드리니, 혹시 관심 있으면 코칭을 받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언젠가 진행했던 수업 시간에 미래에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다가, 내 꿈은 코치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강사님은 나의 대답을 허투루 듣지 않으셨다. 자신의 지인, 친구들 중 코칭을 하시는 분들에게 내 이야기를 공유하시고 이미 무료 코칭 세션을 약속받은 상황에 나에게 연락을 하신 거였다. 내로라하는 국내 대기업에서 사장을 역임하시고, 퇴직 후 수석 코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을 연결해 주셨다. 유선 너머지만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우와! 우와! 소리만 내뱉으며 대답을 잘 못했다. 이 무슨 상황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분은 네이버에 검색하면 프로필에 뜰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비지니스계의 탑 연예인 같은 느낌이랄까. 내 경력으로는 감히 만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분을 갑자기 소개해주시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었다. 귀한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연달아하니, 부담 갖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자신과 골프를 칠 정도로 친한 사이라 그냥 가볍게 부탁한 거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강사님이 나를 깊이 이해하고, 내가 수렁에 빠지지 않고 더 좋은 길을 가기 위해 일부러 인맥까지 동원하셨음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을 눈치채시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조언을 지인들에게 구하셨음을 말이다. 한 번도 실제 만난 적 없이 줌에서 수업만 한 사이인데,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신다는 것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연결과 기회였다.


내가 힘들 때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에게는 그게 때로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배움이었다. 멘털이 약해졌을 때 동료나 팀원이 있는 힘껏 나를 잡아주었다. 영어 수업으로 시작한 관계가, 또 다른 관계로 이어지고 확장되어, 코치님과의 만남으로까지 연결되었다. 회사 생활 바닥을 칠 때 배웠던 코칭 수업이, 정식 코칭과 기회로 연결된 적도 있었다. 

인생의 기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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