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상대적이더라
강적을 만났다.
나름 여러 해 회사생활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캐릭터는 처음이다. 최근 한 임원분이 다른 부서에서 우리 부서로 발령을 받아 합류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장님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배경도 알 수 없는 급작스런 인사 발령에 민심은 술렁였고, 그분에 대한 각종 루머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상꼰대라 밑에 사람들이 못 버티고 그만뒀다느니, 전 직장에서 컴플라이언스 문제로 회사를 잘렸다느니 등등의 흉흉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분의 팀원들은 벌써부터 퇴사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나는 나만의 머리 아픈 일로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소문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원래 내 근심 앞에서 남의 이야기는 사치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떠돌던 소문이 내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리더분이 지시한 워크숍 계획을 짜는 회의가 있어 그 분과 처음으로 마주 앉게 되었다. 리더분은 앞의 다른 회의 때문에 늦는다 하셔서 우리끼리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분은 미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워크숍에 대해 침 튀기며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지금 가장 급한 건 장소 예약이니, 빨리 장소부터 예약하시죠! 누가 하실래요?"
사실 이 워크숍은 사장님이 시켜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내년 전략 발표를 위한 자리였다. 우리 부서에서는 이 워크숍의 취지와 시기 등이 아직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아니지, 전략이 아직 나오지도 않아 무엇을 발표할지, 혹은 누가 발표할지 등등의 사람 선정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장님이 가시면 그 분과 관련된 전략기획, 회계 등의 부서에서도 동행하는데, 그 부서나 인원수의 파악이 아직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말씀드렸다.
"아직 인원수 파악이 힘들어서, 먼저 우리 부서에서는 누가 갈지에 대한 논의를 리더분과 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누가 갈지는, 우리의 전략 방향성에 따라 그 담당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먼저 전략에 대한 논의부터 하시면 어떨까요"
그분의 눈은 동그래졌고, 얼굴은 귀까지 빨개졌다. 엄청 당황한 눈치다. 마치 내가 그에게 대들며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그의 부하직원을 보는듯한 반응이었다. 아마 이전 회사에서는 그가 말하면, 다들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우리 부서는 수평적 문화에 개인의 발언권이 높은 편인데, 이 분이 보기에는 윗사람 말도 안 듣는 개판 문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다 싶었다.
얼마 후 리더분이 들어오고, 다시 회의가 시작되었다.
30분 남짓의 짧은 회의동안 여러 감정을 느꼈는데, 그건 대부분 '아, 나도 저런가? 절대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였다. 내가 파악한 그분의 특징과 느낀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질이 무지 급하다
나도 어디 가서는 빠지지 않는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 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은 이미 워크숍 완료 시점으로 가 있어, 회의를 이끌면서도 남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혼자 머릿속으로 장소, 인원, 프로그램을 다 정해놨다. 남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면, 칠판에 가서 자신의 생각을 이것저것 적는다. 그리고 이게 맞지 않냐며, 답답한 눈빛으로 빨리 결정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까 대화와 같이, 내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낼라치면 바로 끼어들어 반박을 했다. 사실 미팅의 90%는 그분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남들이 의견을 낼 때 아예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말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결론으로 밀어붙였다. 이럴 거면 뭣하러 의견을 냈나 싶을 정도로.
리더가 말하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게 설령 똥일지라도
신기하게도 동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리더가 간혹 한마디를 하면 바로 '네네, 맞습니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 유일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리더를 받아들였다. 실은 리더도 온 지 얼마 안 된 분이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도 많아, 나는 중간중간 끼어들어 방향성을 수정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불편한 시선. '감히 너 따위가 리더의 말을 끊어?' 이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해본다.
이 회의를 하며, 저 인간과 앞으로 어떻게 일해야 되나 절망도 되었지만 한편 다른 생각도 들었다.
내가 평소에 저랬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반성의 감정이다. 한 예시로, 그분이 칠판에 나와서 무언가를 쓸 때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팀원들과 회의를 하다가 그들이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나는 항상 혼자 일어나 칠판 가득 무언가를 그리고 적곤 했다. 괜찮은 소통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혼자만의 오산이었다. 남이 하는 걸 보니 팀원들의 눈에도 저렇게 보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다 그려놓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팀장.
그리고 남들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그분을 보며 '불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 이것 역시 팀원이 나에게 느꼈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들이 나에게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때 종종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했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저 저절로 거울치료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남의 입장이 되어봐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과, 역지사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게다가, 자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생각했던 리더분이, 그분 옆에 있으니 다르게 보였다. 그분에 비하면 어찌나 경청을 잘해주던지. 자신의 말을 최대한 아끼고 남의 의견에도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분이 혼자 신나게 떠들 때, 표정은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끝까지 들어주더라. 나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감정에, 전화를 받는 척하며 회의실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말만 늘어놓는 저런 사람을 어떻게 참아낼까 싶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가 보다. 내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나 상황들은, 계속 움직인다. 무언가 다른 일이 생기면 최악은 더 이상 최악이 아닌, 가끔 추억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무엇이 정답일까 생각하다가도, 인생에 정답 따위는 없다는 명언이 떠오른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