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빌리티 No!
연말에 업무가 바빠지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내년 계획 세우기'와 관련되어 있다.
올해도 예외 없이 그 시즌이 찾아왔는데, 평년보다 약 한 달가량 이르다. 얼마 전 갑자기 사장님이 전 부서에 내년 계획을 갖고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 부서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3일의 워크숍을 잡고 직접 참석해서 계획을 듣겠다고 했다. 우리 부서에 부임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은 새로운 리더는, 이를 위한 준비를 각 팀장들에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 부서를 맡은 후 사장님께 무언가를 보여주고 증명해야 하는데, 사장님과의 워크숍 자리가 그 시작이 될 터였다. 그래서 사전에 어떤 계획을 어떻게 발표해야 될지 내부 조율하기 위해 회의를 잡고, 각자 발표를 진행해 보라고 요청했다.
발표의 시작은 영업팀이었다. 아무래도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 팀이고, 내년에 얼마의 매출을 할지가 가장 중요한 사장님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서의 영업팀은 거래처와 지역에 따라 크게 세 팀으로 나뉘는데, 첫 발표하는 A 팀장이 맡은 거래처의 규모와 매출이 가장 크다. 그는 MBA와 전략기획 업무로 다져진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뽐냈다. 7장 정도의 짧은 발표 자료에는, 리더의 입맛을 저격하는 '내년 매출 목표를 뛰어넘어 더 많이 할 수 있는 계획'이 대략적으로 담겨 있었다. 새로운 리더는 발표 장표 하나하나마다 질문을 했고 이를 잘 넘기니, 이미 완벽한 계획을 갖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팀에서 가장 큰 매출을 책임지는 A팀의 계획이 잘 세워져 있다는 것에 흡족한 눈치였다.
이어서 B 팀장의 발표가 이어졌다. A팀보다 매출 규모는 작지만, 주요 거래처를 갖고 있는 중요한 팀이다. 그러나 그가 채 첫 장을 발표하기도 전에, 아까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질문과 혹평이 날아왔다. B팀장은 거래처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기반한 발표를 이어나가고 있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리더는, 이미 기회로 보이는 것들 말고 새로운 건 없냐며 그를 무섭게 다그쳤다. B팀장은 처음에는 이에 대한 대답을 꼬박꼬박 하다가, 발표 자료 마지막장까지 리더가 비슷한 반응을 보이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떠버렸다.
그 둘의 발표와, 리더의 엇갈린 피드백을 듣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좌불안석이었다.
사실 A팀장의 자료는 화려했지만, 알맹이가 전혀 없었다. 그럴듯한 말로 소위 '있어빌리티'를 추구한, 외적인 면에 모든 것을 건 자료였달까. 전략계획서 모범 템플릿을 짜깁기 해서, 리더의 취향에 맞게 편집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내년 계획도 두리뭉실하게, 3분기 프로모션 등으로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내용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한 좋은 말은 이것저것 갖다 붙여 놓은 자료였다.
반면 B팀장의 자료는 내용은 알찼지만, 표현법이 조금 아쉬웠다. 어떤 고객을 어떤 제품으로, 어떻게, 언제 타기팅하여 기회를 만들겠다는 내용은 자세히 적혀 있었다. A팀장의 껍데기뿐인 자료보다 내용 측면에서 훨씬 나았다. 팀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다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부서에 새로 온 리더가 보기에는, 덜 전략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싶은 면이 있었다. B팀장은 주요 거래처 C의 프로젝트를 이기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나열했다. 그러나 리더가 원한 건 C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B팀이 고객사에 전략적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것이었다. 사실 이럴 때는 고객사를 그룹별로 묶어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보여준 후, 그다음 구체적인 계획을 나열하면 될 일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고, 표현만 살짝 바꿔주면 훨씬 더 전달력이 좋았을 것이다.
이번 발표를 지켜보며, 과연 둘 중에 뭐가 더 나은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알맹이는 없지만 겉은 번지르르하게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자료와, 내용은 알차지만 표현이 미숙한 자료. 당연히 내용도 좋고, 표현도 잘하면 최상의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차라리 '내용'을 택할 것이다. 내용은 없지만 겉만 화려한 계획은,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들통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더 신경 쓰며 일하는 상태는, SNS 중독된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도, SNS상에는 얼마든지 반짝이는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실에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보이는 모습만 신경 쓰는 상태는 정말 위험하다.
물론, 내가 한 일에 대한 노력과 그 결과에 대한 충분한 인지와 인정을 받는 것은 꼭 필요하다. 내용은 있지만 표현을 잘 못해 불이익을 받지는 말아야 한다. 내가 한만큼 어떻게 잘 표현할지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것이 SNS의 화려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정당한 인정을 요구하기 위한 행위라고 하면 맞으려나. 리더의 이해도와 성향, 상황 등에 따라 내용의 진실성을 봐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부분 제삼자는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잘 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나의 의도와 노력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사실 내가 발표자료에서 '내용'이라고 말한 것은, '나만의 강점'과 같은 개념이다.
화려한 겉모습은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내용, 즉 나만의 강점은 내가 개발한 오롯이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언가이다. 그리고 나만의 강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시키는 것은, 코어 근육 만들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코어 근육을 만드는 운동은 정말 힘들다. 플랭크, 스쿼트, 계단 오르기 등은 생각만 해도 힘들어,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게다가 코어 근육 만들기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만들어도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코어 근육이 없다면, 쉽게 무너진다. 나의 허리 디스크는 코어 근육과도 크게 관련 있다고 들었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몸의 중심이 되는 코어 근육을 발달시켜야 한다. 나만의 강점도 마찬가지다. 코어 근육 만들기처럼, 강점 개발도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누구나 인정하는 그 사람의 실력이 되는 것이다. 나만의 강점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 그것을 기준으로 여기에 적절한 한 표현이라는 것을 입히면 강력한 브랜딩이 될 것이다.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삶과, 나만의 강점을 추구하는 삶.
남에게 보이는 화려한 삶과, 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 삶.
나는 조금 힘들고 오래 걸릴지라도, 나만의 강점을 개발하고 키워가야겠다고 다짐했던, 어느 긴 하루였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