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대한 찐사랑
"팀장님, 아시잖아요. 저 이 일 진짜 좋아하는 거."
팀원과 1:1 미팅을 하는 시간, 그녀가 불쑥 고백을 해왔다. 자신이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이번 미팅은 사실, 앞으로 닥칠 시련과 대비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조직에 불어닥친 칼바람은, 어김없이 팀원들에게도 향했다. 리더가 바뀌고, 부서의 방향성이 180도 달라졌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예전처럼 변화 앞에서 '못하겠다, 그렇게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조직에서 계속 제외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얼마 후면 나도 이 팀을 떠나는 게 확정인 상황에서 잡힌 미팅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소중한 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냥 들어주기 뿐이었다. 이제 곧 떠날 사람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팀원은, 눈앞에 닥칠 태풍이 아닌, 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논했다. 앞으로 얼마나 힘들지, 변화의 바람이 무서울지에 대해 들을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황한 내 표정과는 상관없이, 팀원은 고백을 이어나갔다.
"저는 정말 제가 하는 일이 좋아요.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일 자체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그녀는, 자기가 친구들한테 이렇게 말하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말했다. 어떻게 일을 좋아할 수 있냐며, 미친 사람 취급도 받아봤다 했다.
일에 대한 고백을 듣자니, 그동안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경쟁사와 차별화된 전시회 부스를 꾸민다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가렌더를 수작업으로 만들었던 A. 벌써 백만 번쯤 검토한 기획서 같은데, 조금 더 잘 쓰고 싶다며 제출하는 그 순간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B. 교육센터 오프닝 행사를 기발하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며, 직접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홍보하던 C. 심지어 팀장인 나는, 팀원들이 저마다 최선을 다했던 그 노력들을 방관하며 쳐다봤다. 내가 원하는 기준이 100이었다면, 팀원들은 120, 200을 달성하고 싶어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나 같으면 전시회 준비에 밤을 새우지 않을 것이고, 어차피 한 번에 통과하지 못할 기획서는 대충 썼을 것이며, 오프닝 행사는 남들 하는 딱 그만큼만 했을 것 같다. 그나마 팀장으로서 내가 최악은 아니었던 건, 그들에게 잔소리하지 않고 일단 시도해 볼 자유를 준 정도였달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 열정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귀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일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팀원들이 눈앞에 일에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했을까. 만약 팀장인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D팀원님, 자신의 일을 사랑하셔야죠."
이걸 듣는 D팀원은, 팀장이 무슨 헛소리를 저렇게 신박하게 하나 싶겠지. 팀장의 잔소리를 들으며, 일에 대한 사랑이 마구 샘솟는 팀원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 일을 사랑하는 마음은, 쉽게 가질 수 있는 마음도 아니며, 누가 그 마음을 불어넣을 수도 없다. 가르친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성향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그 일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 이런 것들이 모인, 고귀한 마음의 집합체다.
팀장은 팀원이 조금 더 일을 잘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만들어주기는 힘들다. 일에 대한 기술을 알려주고 연마하게 기회를 제공하는 건 가능하다. 업무에 대해 설명하고, 연습시키고, 성장에 대해 피드백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을 사랑하라고 강요해서, 뿅 하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 주간 '백종원의 레미제라블'이라는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찾아서 봤다.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도박에 빠지고,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진 출연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100일 동안 주어진 미션을 통과한 최종 1인에게, 자신만의 가게(식당)를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취지다. 여기에는 요식업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요린이부터, 창업까지 해본 10년 넘는 경력자들이 다양하게 출연했다. 매 회가 거듭될수록,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출연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요리에 대한 진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비록 자신의 요리 실력이 지금 형편없더라도, 재료를 대하는 태도와 요리에 진심인 사람들은 티가 났다. 그들은 그 열정 자체로 반짝이는 별 같았다. 눈앞에 손님이 밀어닥치는데 재료가 똑 떨어져 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만약 자신의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바로 포기하고 집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끔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있었는데, 그걸 이겨낸 것은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물어본다. 내가 맡은 일이 정말 재밌을 수 있냐고. 진짜로 일을 사랑할 수 있냐고. 회사에서 내 일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하는 건, 바보같은 게 아니냐고 말이다. 이 질문은 보통, 일 자체와 그 일을 둘러싼 회사의 압박의 심할 때 나온다. 그 일을 시작했을 때 손톱만큼이라도 있었던 애정이, 서서히 차갑게 식는 순간 묻게 된다. 일을 진짜로 좋아하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나는 어떤 지점에서 일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각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닉, 올리브영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는 알바생이라고 가정해보자. 화장품 박스를 들고 나르며 전시를 하는 일을 할 때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뷰티용품에 대해 손님과 상담을 하면서는, 너무 신이 난다. 나도 모르게 손님에게 더 좋은 제품을 추천하고 싶어, 유튜브로 공부를 하게 된다. 내 현실은, 알바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는 고된 상황이지만, 여기에서 일한 경험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 내 일을 100%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일을 분해해보고 최소한 내가 어떤 것에 끌리는가는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부서를 옮기고, 높은 성과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도무지 내 일을 좋아할 여유도 없다. 눈앞에 닥친 것들을 하면서도, 이게 맞나 늘 의문을 품는다. 그런데 어느날 코칭을 받으며 곰곰히 돌이켜보니, 이 일의 성격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맡고 있는 마케팅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고객의 '깊은 마음속 무언가'를 파악하고 꺼내보는 것을 좋아했다. 끝내주는 홍보에는 영 관심이 안 가지만, 고객의 본질과 업의 본질을 보는 일에 열광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감히 이 글에서 주장해본다.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하던, 내가 좋아하는 어느 한 부분만큼은 누구나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꾸준히 그 일을 해나가는 에너지를 채워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