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점을 연결하는 건, 결국 이야기
잘 먹히는 보고서에는, 스토리의 힘이 있다.
“이게 다에요? 그래서 뭐 어쩌자는거죠? 이건 그냥 숫자 나열 아닌가요?”
전무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에 A 팀장은 고개를 푹 숙인다. 어제 밤새며 데이터를 업데이트했건만, 돌아온 건 기대했던 칭찬이 아닌 지적뿐이다.
"오, 그거 괜찮은데요. 한번 디벨롭 해보시죠."
반면 B 팀장의 기획안은 단박에 통과다. 지켜보는 A 팀장은 억울하다. 자기가 봤을 때, B 팀장의 자료는 별볼일 없는데다 시덥잖은 아이디어만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왜 전무님은 저걸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같은 기획안인데도 왜 어떤 보고서는 휴지가 되버리고, 다른 보고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까.
요즘 들어 나는 그 비밀이, 바로 ‘스토리’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왠 스토리텔링?
보통의 직장인들에게 왜 스토리텔링이 필요할까. 회사에서 스토리텔링이라 하면, 브랜딩이나 마케팅을 할 때만 쓰는 거 아닌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 생활 곳곳에 스토리텔링은 존재한다. 우리가 쓰는 보고서, 기획안, 발표자료, 이메일, 그리고 팀 회의에서의 말 한마디까지, 모두 누군가를 설득하는 이야기의 형태다. 상사, 옆 부서, 고객, 파트너 등 다양한 상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팩트 전달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흔히 정보보다 이야기에 더 쉽게 끌리기 때문이다. 각종 데이터로 설명되는 정보는 머리에 남지만, 매력적인 스토리는 마음에 남아 사람들을 움직인다.
점과 점을 연결하는 것은, 결국 스토리이다.
6월초로 다가온 부서별 신제품 전략 발표를 앞두고, 한 부서의 사전 논의 회의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부서에서 잡은 발표 흐름을 살펴보고, 개선 방향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역할이었다. 준비해온 자료를 보다, 한 지점에서 멈추고 세일즈 담당자에게 질문을 했다.
"그래서 이 제품을 어떻게 C 고객이 테스트해보도록 만드신거에요?"
내가 보기에 이 제품은 고객이 먼저 찾을 유형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분명 그만의 전략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그냥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요…”라는 모호한 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그 ‘이것저것’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었다.
조금씩 풀려나온 이야기들—고객과의 스몰토크로 쌓은 신뢰, 높은 가격을 뛰어넘어 제품의 강점을 포지셔닝한 전략, 실패 끝에 성공으로 전환한 첫 테스트 경험까지. 듣다 보니, 무심코 흘려보낼 뻔한 ‘점’들이 하나둘 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바탕으로 즉석에서 멋진 서사를 만들어냈다. 경쟁사 점유율이 80%였던 고객을, 어떻게 우리 고객으로 바꿨는지에 대한 스토리였다.
스토리텔링 = 과대포장?
회사에서 스토리텔링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는, 바로 '포장'의 개념이다. 마치 주먹만 한 사과를 큼직한 박스와 리본으로 치장해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짜 스토리텔링은, 사과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저 사과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태풍으로 인해 떨어진 사과들을 ‘낙과’가 아닌 ‘수험생을 위한 사과’로 재해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거센 바람에도 끝까지 나무에 매달려 버틴 사과처럼, 끝까지 버티자는 의미를 담아 수험생에게 응원의 상징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같은 사과지만, 하나의 이야기만으로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게 된 셈이다. 있는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지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을 잘 하려면, '듣는 사람'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부장님의 이야기와, 진정한 스토리텔링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다 이야기기라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하나는 듣기 싫어 미치겠고 다른 하나는 자꾸만 궁금해진다. 그 한끗 차이를 만드는 건, 듣는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가이다.
스토리텔링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무엇을 궁금해할지, 어디에서 귀가 열릴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들이 궁금해할 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말이 설득이 되고 메시지가 공감을 얻는다. 만약 고객 앞에서 신제품에 대한 제안 발표를 하는데, 어제 부장님께 보고했던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말 안해도 결과는 뻔할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만 더 생각해보자.
잘 먹히는 보고서는, ‘데이터, 정보’보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회사에서 매일 숫자를 다루고, 데이터로 설명하며, 팩트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을 한 줄의 메시지로 꿰어낼 수 있다면, 보고서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상대의 머리와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방향성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기술이 아닌, 시선이기 때문이다.
맥락과 의미, 공감, 그리고 진심 한 스푼을 담은 기획안은, 아마도 전무님의 ‘아니, 그거 말고~’를 ‘오, 그거 좋네요’로 바꾸는 마법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