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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바꾼 직장인의 글

내가 '직접' 쓴 글은 얼마나 될까

by 수풀림

최 팀장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

마치 그의 인격이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OO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 점에 대해 미처 제가 생각하지 못하고 답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얼마 전 그에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회신이 왔다. 원래 한 까칠(?)하기로 유명한 최 팀장이다.

바로 그 최팀장이, 더위를 단단히 먹었나보다. 낯간지런 공감을 하질 않나, 더 나아가 '진심 사과'까지 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 봐도, 그에게 온 답장이 맞다.

평소 같으면 '저희 부서에서 검토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식으로 답을 했을 것이다. 얄미운 말투로, 이건 '너네 부서 문제다'라고 돌려까기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의 새로운 말투에,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당장 내일까지 기획안을 내야 한다.

오늘까지 끝내야 할 업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그저 위에서 갑자기 하라 하니, 반항도 못 해보고 하는 것이다. 기한은 칼같고, 원래부터 없던 아이디어는 금세 고갈된다.
결국 모든 부서원들이 공평하게 숙제처럼 아이디어를 제출한다. 일명 고통 분담.

몇 시간 뒤 도착한 아이디어들은, 놀랍게도 그 결이 비슷하다. 누구는 “고객 중심의 맞춤형 서비스 전략”이라 쓰고, 누구는 “고객 여정 기반의 개인화 마케팅”이라 썼다. 제목만 다를 뿐, 글의 개요나 풀이 방법은 고만고만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아이콘, 1, 2, 3번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요약, 이 아이디어의 장단점까지. 구조상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자세히 내용을 보면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싶은 것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쉽게 눈치채셨으리라.

위의 두 가지 예시에는, 모두 AI가 등장한다는 것을 말이다.

최 팀장의 공감 가득한 회신에도, 유사한 구조와 내용을 가진 기획안 아이디어에도, AI가 활용되었다. 이제 AI 없이 하는 업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특히나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뺏기는 업무 중 하나인 글쓰기는 더더욱 그렇다.

비단 작가들만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직장인의 하루는 글로 시작해서 글로 끝난다. 이메일, 보고서, 기획안, 공지, 홍보 문구까지. 일의 대부분엔 ‘글’이 얽혀 있다.

그리고 요즘 웬만한 직장인의 글에서는, 묘한 'AI 냄새와 말투'가 느껴진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회사 인터넷이 불안정해 AI가 제대로 작동을 안하면, 기획안을 쓰다가 멈출 정도다.


AI는 직장인의 글쓰기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을까.

우선, AI가 가져온 긍정의 변화를 얘기해보려 한다. 앞서 소개한 최팀장의 사례처럼, AI는 글을 ‘정제된 말’로 바꾸는 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회사는 공공의 장소고, 그래서 더더욱 공공의 언어를 써야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런 걸 별로 배워본 적이 없는 평범한 직장인들은, 공공의 언어라는 경계가 너무 어렵다.그래서 가끔은 회사 메일로도, 지나치게 캐주얼한 단어를 쓰거나, 뾰족한 공격의 말을 하기도 한다. 이메일에는 절대 쓰지 말아야 할 단어나 문장을 쓰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

그럴 때 AI는, 꽤 괜찮은 조언자다. 방대한 언어 데이터를 학습한 덕분일까? AI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 글이 보일지 판단하고, 더 명확하고도 공손한 문장을 제안해준다. 만약 최팀장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필터 없이 메일로 썼다면, 벌써 머리채 잡고 싸우고 있겠지.

게다가 나보다 훨씬 빠르기까지 하다. 한 시간 걸려 쓸 문장을, 불과 오분만에 다 써준다.


이런 AI의 장점에도, 부작용은 있다.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건,사람들의 글이 하나둘, 비슷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팀장의 회신 메일에서 느껴진 말투와, 김팀장의 이메일은 닮아 있다. 발신자를 익명으로 했으면, 구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보고서나 기획안도 마찬가지다. 유사한 구조, 내용, 심지어 말투까지.

차이가 있다면, 어떤 AI 플랫폼을 활용했냐에 따른 정도랄까. ChatGPT는 좀 더 공감하는 말투로, Perpelxity는 다양한 레퍼런스를 인용하는 것으로, 회사 자체 AI는 회사 내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들로.

특히나 이런 현상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글을 써야할 때 도드라진다. 직접 경험한 바로는, 내가 잘 아는 것은 AI를 써도 못미덥다. 가끔 AI가 멍청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AI는 반짝반짝 빛난다. 이렇게 천재적이나 싶다. 그러니, AI가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따다가, 붙여 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획일화된 글만 남는다.


직장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AI와 글쓰기.

부작용도 분명 있지만, 앞으로는 아예 AI 없이는 업무 자체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그만큼 생산성에서 격차가 날 것이고, 글쓰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직장인은 어떻게 AI와 ‘현명하게’ 글을 써야 할까?

나는 무엇보다 먼저, 내 ‘관점’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잘 정리하는 건 AI가 해줄 수 있지만,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결국 내가 결정해야 한다. 관점이 없으면, 글은 쉽게 흐려지고, 결국 AI 말투만 남는다.

그리고 나만의 관점이란, 단시간 내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직접 겪어보고 부딪혀보면서, 깨닫게 된다. 차곡차곡 쌓인 나만의 관점이 있는 상태에서 AI를 쓰면 다를 것이다.

AI가 주는 답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관점으로 다시 질문을 해보는 것. 왜 이런 답이 나왔을까, 나는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가 등등.

직장인의 글에는, 그 업무의 중심에는, '나'와 '내 관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AI를 똑똑하게 활용하되, 나의 목소리를 글로 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연습해야 할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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