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에 대한 생각
존버 해? 말아? 회사 다녀? 때려치워? 버티면 뭐가 되기는 되는 거야?
혹시 유튜브에서 이 컨텐츠를 보신 분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가수 이적씨가 게스트들과 함께 하나의 제시어로 다양한 관점을 수다떨듯 나누는 '적수다'라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다정함, 무쓸모, 짝, 개소리 같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뤄왔는데, 얼마 전 나온 5화에서는 '존버(존나게 버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필이면 '존버'라니. 나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괜히 뜨끔했다. 아마도 지금 회사에서 존버 중인 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사실 나는, 존버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가득한 사람이다.
직장에서의 존버 이미지는, 꼰대이자 말년차 부장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명 회사에서는 눈치를 주면서 나가기를 바라는데, 그냥 버티는 사람들.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 생각할지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어 참고 다니는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시선은 나에게도 예외없이 해당된다. 여기가 싫어 퇴사하겠다 굳게 결심했는데, 결국은 눌러 앉은 내 모습이 때론 볼썽 사납게 느껴졌다. 뭔가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이랄까. 멋지게 퇴사한 사람들이 부럽고, 존버하는 내 자신은 초라하게 생각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잘 모르는 회사 동료나 후배들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묻는다.
"우와, 십 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닐 수 있는 비결이 뭐에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솔직하게 이렇게 답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다.
'저도 이렇게 오래 다니고 싶지는 않았어요. 나갈 용기가 없어 그냥 머물고 있는 거에요.'
지겨움에, 답답함에, 주위의 눈치에,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밖의 세상이 무서워서 못 나갔을 뿐이다. 존버하고 싶어서 존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용기가 없는 거였다.
요즘은 여려워진 경기 때문에 존버의 삶이 다시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회사에서 존버하고 있는 내가 답답해 보였다.
그런데 한참을 한 회사에서 버티며 살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때로는 퇴사보다 더 어려운 게, 참고 버티는 것일수도 있다고. 특히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채 1년도 안되어 퇴사나 이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고, 존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닐 수 있겠다 생각했다.
흔들리는 바람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 주변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누가 떠나고 누가 오든,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사람들. 처음엔 그저 답답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잡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한편으로 존경심을 느꼈다.
생각없이 버티는 것 같아 보이는 존버의 시간도, 그냥 흘러가는 건 아니다.
오롯이 그 지루한 시간과, 다양한 변화들을 견뎌내고 겪어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일의 맥락을 아는 것, 조직의 암묵적인 룰을 체득하는 것, 누구에게 물어야 일이 빨리 풀리는지 아는 것.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보이듯, 어떤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여러 번 경험해봐야 일의 본질이 보인다. 이건 스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실무에서는 누구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고백하건대, 나는 팀장이자 면접관으로서 한 분야나 직장에서 1년 미만의 짧은 경력을 가진 지원자들을 경계하게 된다. 물론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쌓아가고 견디고 인내하는 시간 없이 자주 옮긴 이력은 아무래도 신뢰를 주기 어렵다. 반대로 한 곳에서 오래 버틴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어떤 메시지를 준다. 이 사람은 어려운 순간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을 시간을 투자할 줄 안다는 것. 때로는 화려하지만 짧은 이력을 가진 사람보다, 한 곳에서 묵묵히 버티며 쌓은 내공을 가진 사람에게 더 끌린다. 그것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이직 시장에서는 책임감의 지표가 되기도 하니까.
퇴사는 용기다.
하지만 버티기도 또 다른 종류의 용기다. 어쩌면 퇴사보다 더 어려운 용기일지도 모른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의미를 찾아내고,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가는 일. 책임감 있게 나와 가정의 경제를 꾸려가는 것. 유행처럼 흔들리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내 속도로 내 일을 해내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걸 아는 것. 어쩌면 그게 존버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다.
내가 생각 없이 회사에서 존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하시는 분들께, 한번쯤은 존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찾아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