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과 퇴사의 공통점
"와, 드디어 정상이다!"
천 개가 넘는 계단과 작고 큰 바위가 놓인 길을 오르고 또 올라, 월악산 정상에 다다랐다. 추석 연휴, 남편의 꾀임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던 길이었다. 숨은 차오르고, 마실 물은 모자라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등산 스틱까지 부러트렸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끝까지 갔다. 꼭 정상까지 가야되나 의문이 들었으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산 꼭대기에 도착하자, 이곳에서만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풍경에 압도되어, 힘들게 여기까지 온 고생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산에서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다리부터 후들거렸다. 겁이 덜컥 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산을 오를 때는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내려올 때는 심리적인 어려움이 컸다.
'까딱하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어떡하지?'
'저기 바위는 너무 미끄러워 보이는데? 굴러 떨어질까봐 무섭다.'
암벽 끝까지 잘 설치된 계단과 손잡이를 이용해 내려가는 데도, 결코 쉽지 않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면 꼬꾸라질까 두려웠고, 내리막 진흙길에서는 그대로 슬라이딩을 할까봐 걱정스러웠다.
"너는 내려가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보다 못한 남편이 말했다. 산에서 잘 내려가는 법이 따로 있나 싶었는데, 그는 여러 가지를 얘기해줬다. 등산 스틱 길이를 늘려 조금 멀리 찍기, 상체를 수직으로 세우기, 체중을 실어 걸으며 몸의 중심잡기 등이었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산을 잘 하는 법이 있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잘 내려오는 방법을 배우면 좋지 않을까?'
산을 오르는 건 승진과 커리어 디벨롭이랑 비슷했다. 직장인들은 자신만의 정상을 목표로 삼고 꾸준히 올라간다. 힘들지만 참고 견뎌내며 승진도 하고, 이직도 하면서 한 계단씩 올라간다. 올라가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라, 책에도 나와 있고 회사에서 알려주기도 하고 주위에서 조언도 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잘 내려오는 법'에 대해서는 쉽게 배우고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이런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 뿐더러, 내려갈 수도 있다는 상상조차 잘 하지 않는다. 특히 한창 일할 때인 3-40대에는, 커리어의 정상에 어떻게 오를지를 열심히 찾아보고 궁리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커리어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예를 들어 갑자기 한직으로 발령이 난다거나, 승진에서 밀린다거나, 권고사직 대상자가 될 때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마치 산에서 갑자기 안개가 끼어 길을 잃은 것처럼 당황스럽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밀려온다.
내가 생각해본 회사에서 잘 내려오는 방법의 첫 걸음은, '인식'이다.
나도 언젠가는 회사라는 조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더 이상 오를 곳이 없거나, 체력이 바닥났거나, 혹은 다른 산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온다는 걸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건 포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인식 전환이다.
두 번째는 미리 하는 '준비'이다. 하산할 대비가 안 되었는데 갑자기 절벽 끝에 내몰리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성급한 퇴사와 이직은, 다음 커리어에 대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원하는 커리어 방향성을 설정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있어야, 안정적으로 회사에서 하산할 수 있다.
내려가는 것은, 결코 슬프기만 한 일이 아니다.
등산의 즐거움 중 하나는, 힘을 덜 들이고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것에 있지 않나. 회사를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려온다는 것은 절대 '끝'이 아닌, 다른 커리어 여정의 출발점이기에.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내려오며, 다음에 오를 산을 바라본다.
어쩌면 진짜 용기는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내려올 줄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월악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처럼, 하산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는 것도, 완주의 과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