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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귤씨 Aug 21. 2023

멧돼지님, 살게만 해주세요.

남해편백자연휴양림 가마봉 등반하기


어렸을 적, 엄마는 나를 훈계하는 방식으로 '등산'을 선택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올림푸스 디카를 가지고 산 정상에 갔다는 인증샷을 찍어야 했다. (내가 등산을 멀리했으니 싫어하는 행위로 처벌했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훈육법인 거 같다.) 성인이 되고는 등산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한 때 산 정상에서 해발고도가 함께 적혀있는 바위에서 인증샷을 찍는 열풍이 불었을 때도 난 한사코 등산을 가지 않았다. 정상에 가면 모든 것이 보상받는다는 뻔한 말보다는 굵은 땀을 흘리며 넘어졌던 등산의 과정만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고, 미화되지 않을 것 같은 기억도 때론 좋게 회생되며 사람을 다시 우둔하게 만든다. 도시의 무채색에 희뿌여진 동공을 다시 물들이고 싶었던 것인가, 나는 그토록 벌레 많고 힘들다는 산이 그리웠고 작열하는 태양을 나 홀로 맞는다는 느낌이 그리워 자꾸만 자연이 만개한 곳들을 여행지 삼아 기웃거리다가 남해에 한 달 살기로 내려와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1년 동안 미국에 간 경험이 있는데, 캘리포니아의 날씨 덕에 자신은 우울한 인간이라 생각했다가 그곳에서는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속이 없나?' 싶을 정도로 가벼워지고 즐거워졌다고. 그래서 의외로 인간은 날씨, 사는 곳, 주거 환경, 근무 패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언어의 영향력을 강조한 사피아워프의 가설만큼이나 이동진 평론가가 말한 환경의 영향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남해의 온화함과 바다의 풍경은 성질 급한 나를 다림질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때문이다. 일상의 풍경에 초록과 파랑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깔려있는 남해에서는 생각도 행동도 조금은 여유로워진다.


우리는 산을 표현할 때 줄곧 난화를 그리듯이 세모로 삐죽하게 그리곤 하지만 사실 그 테두리는 모두 다른 나무들이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자연의 선들을 만들고 있으며, 그 나무 뒤에는 다양한 생명들과 이야기가 있다는 걸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을 가게 됐다. 산림청에서 걸어놓는 다양한 나무종들에 관한 정보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이제 성수기의 열이 한 풀 꺾이고 월요일인지라 휴양림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등산로 초입부에 있는 야영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등산로에는 정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하산할 때까지 나밖에 없었다. 정상에 이르렀을 때 차를 가지고 온 산림청 직원분들로 보이는 두 분을 제외하면 나는 등산객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인적 없는 적막 속에서 한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나는 두려웠다. 영화 그래비티 속 적막의 우주가 숲에 고스란히 담긴 느낌이었다. 누군가 해를 가하거나 야생동물에 치여도 아무도 모를 거 같다는 생각에 땀이 더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들은 숲 속에서 더 공포스럽게 들렸다. 나는 흡사 아무런 공격력이 없는 사슴처럼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짧은 코스여서 힘들게 오른 정상은 절경이었다. 근데 막상 오르고 나니 이 절경을 나 혼자 보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한동안 정자에 앉아있었다. 사람이 싫다고 혼자 있는 게 좋다고 했건만. 막상 산에 아무도 없으니 누구라도 좋으니 이 산을 같이 탔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짝꿍에게 영상 통화도 걸었으나 핸드폰을 매개로 보고 있는 이 자연 속에서 더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복잡 미묘한 마음을 붙들고 신나는 하산길에 다시 올랐다.


그런데 하산길 중간 즈음에 갑자기 숲 속에서 자꾸만 알 수 없는 소리가 반복해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잠깐 멈춰서 울창한 편백나무 숲의 전경에서 무얼 찾는지도 모른 채로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멧돼지인가? 하는 소리에 온몸이 얼었다. 멧돼지가 나에게 갑자기 달려든다면 어쩌지? 이 편백나무는 높아서 하단부에는 가지도 없어서 내가 오르지 못할 거 같은데... 저 연약한 단풍나무에 오르면 그대로 고꾸라지려나? 아까 짝꿍이랑 잠깐 통화한 게 내 마지막이 되려나?...(이하 생략) 등등 별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핸드폰 인터넷이 작동돼 네이버에 빠르게 '멧돼지를 만났을 때 대처법'을 검색했다.

멧돼지를 흥분시키지 말아라, 갑자기 전속력을 다해 달리지 말아라 등의 조언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 살게만 해달라고 갑자기 온갖 신(?)을 천명했다.


내가 두 눈으로 보지도 않은 상상 속 멧돼지와 씨름하며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최대한 느릿하지만 신속하게 하산했다. 하산한 등산로 초입부에 다다르자 나는 '하!'하고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멧돼지라고 착각한 소리의 근원은 사실 새로운 야영캠핑장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장 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어이없는 한 편 갑자기 힘이 풀려 잠시 계곡가에 앉아 공사 소리를 들었다.

'슥-스슥', '싸악 싸 아악'과 같이 사포질 소리를 아무런 정보도 없이 홀로 숲 속에서 들으니 야생동물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으니 혼자 멧돼지라고 호언장담했던 그 소리가 다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명징하게 들린다. 나 혼자 속고 나 혼자 안도해 삶에 갑자기 감사하는 황당무계한 일을 오늘 편백휴양림에서 경험했다. 동시에 정말 숲 속에 있는 동물들은 저 소리에 얼마나 움츠러들고 숨고 무서워할까― 하며 한 마리의 숲 속 구성원의 경험을 하게 됐다.



오늘 가상의 멧돼지님과 싸우며, 나는 불안해하고 갈등하는 내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동시에 일단 우리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산을 오르다 넘어지거나 헤매는 것쯤은 충분히 해 볼만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단언하고 오독해 버린 그 소리 혹은 멧돼지에서 파생되는 두려움은 그저 하염없이 불안만 하는 '나' 자신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건실히만 있다면, 상처에 금방 휘발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나갈 수 있다.


역시 난,

어렸을 적 엄마가 보냈던 등산처럼 난 산 정상보다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꾸 얻는 거 같다.

이래서 정상 그 자체는 나에게 감동을 주지 않았던 건가―생각하며 다시 숙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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