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자서전, 먼저 간 이의 길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검을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썼던 서산대사의 서시(選試)이다. 언제나 사납게 눈보라 치는 길을 걷고 있는 조국의 위기를 마주하며 그저 자기 자신의 안위나 현실에서의 정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뒤에서 그 길을 똑같이 걸어줄 사람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를 남긴 종이에서나 혹은 그의 삶에서나 백범이 남긴 먹물의 길은 과연 강직하고 굳건하다. 과연 백범은 어떠한 심정으로 이 시를 아꼈던 것인지 저자로서는 짐작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으레 책이라는 것이 그런 것처럼, 뒷길을 걸어오는 이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의 지도를 전하듯 백범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분명히 그 길을 따라갈 이 시간의 사람들에게도 등불을 내밀어 주었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온 국제 사회가 떠들썩한 이 마당에,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그 길을 걸었는지 궁금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백범일지는 상, 하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상편은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일하며 언제 죽음을 마주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의 두 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유서 대신으로 쓴 책이며, 하편은 그가 겪었던 숱한 잘못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게 하려는 것에 있다. 백범은 정말이지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독립의 길로 뛰어든 것이라고 그의 출간 사에서부터 간곡히 외친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백범에게 범인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우리의 시선에서 그는 국모 보수 國母 報 讐를 소리치며 왜인 쓰치다를 죽이고 온 사방에 그가 하였다고 알린 것을 보면 범인은 무슨, 그가 의도했듯이 그는 철저히 이인 二人이었다. 아무리 난세에서 이인,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라 하나 그는 철저히 우리와는 다른 종으로 태어난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하지만 생각보다 그는 그렇게까지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분명히 백범이 커가며 망설임 없이 그 길로 들어설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그는 여러 곳에서 종종 시행착오를 겪는 모습을 가감 없이, 과감하게 그대로 비추어준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열정이 있는 것은 틀림없어 심혈을 다하여 학문의 길에 정진하였으나, 과거장에서 벌써 그 시대, 그 이전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돈의 힘을 보고 공부를 그만두게 된다. 내가 의아하였던 것은 백범 아버님의 말씀이었는데, 이를 ‘옳게’ 여기시고 복록과 선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니 어느 한 곳에도 좋은 상은 없으니 비탄에 빠져 상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하기도 한다. 후에는 또 동학에 입문하였다가 뒤에는 예수교에 들기도 한다. 워낙 심지가 굵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박여 있다 보니 나로서는 꽤 놀라운 일들이었다. 나로서는 그는 원래부터 오로지 독립만을 외치며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사람일 줄 알았다. 그 예상과는 반대로 그는 과거는 진작에 길을 접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세상 이곳 저곳에서 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또 많은 사건을 실패하였다. 그렇다. 그도 나와, 우리와 이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수많은 군중 속에 한 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인 二人으로 만들었는가. 그에게는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그의 이상이 있었던 것이라 저자는 생각한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겠다는 그의 이상, 그것을 그리는 그의 간절한 열망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는 마음, 그래서 할 수 있었던 행동들이 그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우리의 시선에서의 이인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그런 큰, 세상을 바꾸는, 백범의 소원대로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은 그런 큰마음과 열정에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백범은 책 안에서 그가 거쳤던 시간에 따라 그 나름대로 답을 여러 학자나 성자의 답에서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는 언제나 두려움 앞에서, 망설임 앞에서 그에게 교훈을 주었던 여러 사람의 말, 선진 들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가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나는 백범에게 묻지 않았음에도, 물을 수 없음에도, 이렇게 얘기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범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범인임을 이야기 했다. 이 책 그 어느 곳에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인 二人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굳이 이인이 되어서 세상을 바꾸어야 할 필요도 없다. 빛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인 같은 큰 인물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나는 내 자리에서, 범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많은 이인이 등장하고 무수히 많은 총명함과 기개를 지닌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그곳에 있게 한 것은, 그렇게 이인으로서 비추어질 수 있도록 만든 사람 중에는 분명 많은 평범한 범인이 있었음을 안다. 범인인 나도 나대로의 길을 사랑하며 걸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는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범인의 자서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