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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들림 May 26. 2020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상향, “템페스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찾아서

 근래에는 책을 더 읽어갈수록, 더 실패하는 책이 많아질수록, 나는 전혀 문학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모든 이들이 찬탄하는 섬세한 문장과 아름다운 문체에는 영 재주가 없어 그게 무슨 말인지 해석하려다 화를 내며 책을 덮기 일쑤다. 특히 인간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너무 복잡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문장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읽었던 적도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한 문장 한 문장에 트집 잡을 것이면 왜 책을 읽는 것인지 나에게 묻지만, 아마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학적 해석이라는 것이 영 안 되는 사람인 듯하다. 아무리 사람마다 책에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책 뒷면에 쓰인 비평에서는 온갖 칭찬이 넘쳐나고, 이렇게 많은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 글을 보고 나를 보며, 정말 나는 문학과는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만 든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나에게 그런 작가 중 하나였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지난 천 년간 최고의 작가. 모두 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 사람을 수식하는 문장들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등 그의 글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시대를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글이 되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그의 글들은 나에게 큰 감동을 떠안겨 주지는 않았다. 이번에 셰익스피어의 최후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템페스트’를 집어 들면서도 과연 내가 잘 읽어낼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솔직히 말하건대, 첫 부분을 읽어나가면서 이 걱정은 점점 크기를 불려갔다.

  템페스트는 누가 봐도 셰익스피어가 쓴 글이라고 말하듯이 갖은 비유와 아름다운 구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글이다. 화려하기가 그지없고 어떻게 이런 단어들을 조합해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 색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런 문체로 셰익스피어는 어쩌면 그 시대이기에 가능했을 약간 터무니 없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 장을 비바람이 몰아치는 배에서 시작하기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예측도 하지 못했지만, 가히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였다. 동생에게 속아 공국을 빼앗기고 어린 딸과 함께 무인도에 버려졌지만, 알고 보니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어 난파당한 무인도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사람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현재 시대에 즐기고 있는 드라마에 버금가는 줄거리로써 그 시대의 희곡의 역할을 탁월하게 해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장르의 특성만큼 논리적인 전개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과연 이 전개 속에서 그다음 장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해서라도 읽게 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이 책은 내 이상한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장장 책의 초반부터 100페이지 이상 진행되어온 복수를 한순간에 접어버리고 자기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사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서 자기를 지킬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그의 마술의 힘도 던져버렸다. 진실로, 내가 제일 원하지 않던 결말이었다. 처음부터 복수를 결심한 주인공이, 그것도 이미 복수를 진행 중이던 주인공이, 복수의 ‘허무함’을 깨닫고 용서한다는 물러터진 주인공의 성격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복수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얘기가 그렇게 바보같이 들릴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과대해석을 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과연 이 장면을 보고, 조건 없는 용서를 보고, 이 책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인가 궁금해졌다.

  자기를 배반하고 긴 세월 동안 상처 입힌 그들을 왜 용서했나. 주인공이 모든 것을 앗아간 상대방에게 한 용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뛰어넘는, 종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조건 없는 용서였다. 이 책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였던 악의, 불의, 배반 따위로 얼룩지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성질의 것이었다. 자기를 배신한 동생에게서 그 어떤 참회의 말이나 이번 일을 복수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받지 않았지만, 자신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마법까지도 깊은 바닷속으로 던져버리고 만다. 아직도 자신의 혈육이라는 것에 대한 남은 신뢰가 있었던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완벽한 용서는 내가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용서’라는 주제를 다룬 많은 드라마나 소설을 보았지만, 이 희곡에서의 특별한 점은 다른 사람이나 영적인 존재의 조언이나 압박 없이 오로지 주인공 혼자서 만들어낸 오롯한 그의 결정이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통제할 힘을 가진 주인공이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포용했고, 난 이 부분에서 왜 이 책이 다른 사람에게 ‘인생의 찬가’라고 불릴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문장들 속에서 그가 사랑하는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글자로 엮어진 세계에서라도 계산 없는 사랑과 용서를 담길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희곡이기에 가능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 찬란하고 눈부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가히 ‘인생의 찬가’라고 불릴 만하다.

  사실 저런 동화 같은 일은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랬기에 맨 처음 주인공이 복수를 그만두고 용서할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아무리 마법이 있는 세계라 하지만 너무 맥락 없는 용서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이 있는 세계가 종이와 검은 활자로만 존재하더라도 어딘가 분명히 있다고 말해주었고, 그 덕분에 이따금 이 세계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속삭여주는 듯해서 말이다. 너무 멀게만 보이던 셰익스피어의 글은 나에게 잔잔하고 따스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너무 낙관주의적이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의 딸, 미랜더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한다니,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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