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아래의 세자 / 궁, 그 보이지 않는 칼날

전생 연분 8

by 신비

궁의 밤은 깊었다.


그러나 궁 안의 등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왕세자 이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


높은 담장 너머로 도성의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궁 안의 공기는 늘 같았다.


숨을 크게 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공기.


어릴 적부터 그랬다.


걸음 하나,

말 한마디,


시선 하나까지도

늘 절제하며 살아야 했다.


왕세자라는 자리는

사람을 높이는 자리라기보다

사람을 묶어 두는 자리였다.


문득

며칠 전 저잣거리의 풍경이 스쳤다.


사람들이 뒤섞여 웃고 떠들던 곳.


그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걷던 이영의 모습.

어디든 갈 수 있는 걸음.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눈에 남았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여인.


허연서.


처음 보는 사내의 이마에

망설임 없이 딱밤을 날리던 여인.


그 짧은 순간의 눈빛이

이상하게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궁 안에는 생각해야 할 일이

그보다 훨씬 많았다.


왕세자의 자리.


그 자리를 바라보는 눈이

궁 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오래전부터

조용히 자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경빈마마였다.


경빈마마의 처소 역시

밤이 깊었으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궁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마.


경빈마마가 시선을 들었다.


세자께서…


잠시 말을 고르던 궁인이 고개를 숙였다.


“… 또 저잣거리를 다녀오셨다 합니다.


방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경빈마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웃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참으로 바쁜 세자로구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궁 밖을 드나드는 일이

여러 번이라 합니다.


경빈마마는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가늘게 흔들렸다.


세자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궁 안에 있어야 하는 자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경빈마마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내일…


말끝이 낮게 떨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다.

궁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경빈마마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사람을 보내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궁인이 물러났다.

등잔불이 잔잔히 흔들렸다.


경빈마마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같은 밤.


중궁전.


중전마마 역시

잠들지 않고 있었다.


궁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다.


마마


중전마마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세자 저하께서 요즈음

바깥출입이 잦다는 말이

궁 안에 돌고 있사옵니다.


잠시 고요가 흘렀다.

중전마마의 손이 멈추었다.


… 그렇더냐.


최상궁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중전마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입을 열었다.


세자는…


말이 잠시 멈추었다.


알 수 없는 아이로다.



등잔불이 잔잔히 흔들렸다.


궁 안에는 없는 것이 없거늘.


중전마마의 눈빛이 어둠을 향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어찌하여 밖을 내 도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중전마마의 생각이 조용히 이어졌다.


이제는…

세자도 세자빈을 맞이할 때인가.


그리 된다면

궁에 조금은

마음을 붙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중전마마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전하여라.


최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무엇을 전하겠사옵니까.


중전마마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호하였다.


세자에게 말하라.


잠시 멈추었다.


궁 밖 출입을 하지 말라 하여라.


방 안의 공기가 조용히 굳었다.

중전마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궁은…


세자가 가벼이 발을 옮겨도 되는 곳이 아니다.


궁녀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중전마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방 안의 공기는

숨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조용히 조여들고 있었다.


그 밤,

궁 안의 등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궁 어딘가에서는


이미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왕세자 이현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궁을 벗어나는 그 길이


이제


누군가에게는


기다리던 길이 되었다는 것을.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