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

전생 연분 9

by 신비

다음 날 아침.


경빈의 처소.

문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들려왔다.


마마.


경빈이 얼굴을 들었다.


우의정 대감께서 드셨사옵니다.


어젯밤.

경빈이 사람을 보내 부른 이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경빈이 낮게 말했다.


“어서 뫼셔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우의정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조용히 예를 올렸다.


마마를 뵙사옵니다.


경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


일은… 어찌 되어 가고 있사옵니까.


우의정의 시선이 잠시 가라앉았다.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사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잠시 후 그가 덧붙였다.


…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마마.



경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옅은 미소만을 띠었을 뿐이었다.


그날 낮.
경빈은 중전의 처소를 찾았다.


중전마마를 뵙사옵니다.


중전이 시선을 들었다.


경빈이로구나.


경빈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마… 혹 들으셨는지요.


중전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경빈이 고개를 숙였다.


세자저하께서 요즈음
궁 밖 출입이 잦으시다 하더이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고요해졌다.

중전의 시선이 경빈에게 향했다.


그래서.


짧은 한마디였다.

경빈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세자저하의 몸이 귀하옵니다.
혹 염려될까 하여 말씀을 올렸사옵니다.


잠시 침묵.

중전이 천천히 말했다.


세자의 일은.


내가 안다.


두 번 다시는 그 입으로 세자를 입에 올리지 말라.”


그 말에는 더할 말이 필요 없었다.
경빈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경빈의 입가에는
아주 미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경빈이 물러간 뒤.
중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세자는 어디에 있느냐.


상궁이 고개를 숙였다.


동궁에 계시옵니다, 마마.


중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궁으로 가자.


동궁 앞.

문 앞에 서 있던 내관이
중전을 보자마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중전마마를 뵙사옵니다.


중전이 물었다.


세자는 안에 계시느냐.


예, 마마. 안에 계시옵니다.


중전이 담담히 말했다.


세자저하께 고하시게.”


예, 마마.


내관이 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자저하.


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내관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중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 드시라 하여라.


문이 열렸다.
중전이 동궁 안으로 들어섰다.

어마마마.


중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머니의 정과

중전의 위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잠시 후 중전이 입을 열었다.


세자.


짧은 부름이었다.


요즈음 궁 밖 출입이 잦다 하더구나.


이현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중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궁 안에는 귀가 많다.


낮은 음성이었다.


네가 어디를 다니는지 이미 말이 돌고 있다.


이현의 손이 조용히 굳었다.
중전의 시선이 깊어졌다.


혹 그 말이
전하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세자는 이렇게 말하여라.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해졌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고충이 있는지 직접 보고 듣고자
저잣거리를 나갔다 하여라.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전이 천천히 덧붙였다.


세자는
왕이 될 사람이다.


잠시 침묵.


세자의 걸음 하나가 곧 나라의 일이 된다.


이현의 턱선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때 중전이 말을 이었다.


이제 세자도
세자빈을 들일 때가 된 듯하구나.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했다.

이현의 시선이 올라갔다.


… 원치 않사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중전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세자.


중전의 음성은 낮고 단단했다.


세자의 혼인은
세자의 마음으로 정하는 일이 아니다.


잠시 침묵.


이미 생각해 둔 집안들이 있다.


이현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중전은 한동안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궁은.


네가 싫다 하여도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중전이 돌아섰다.

문이 닫히자
동궁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궁이라는 곳은
숨을 쉬는 것조차 이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그러나
문득 저잣거리의 소란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거친 말소리.
자유롭게 오가는 발걸음.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한 여인.


처음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린 여인이었다.


참으로 무례한 여인이었지.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기억할 까닭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은.


그리고
문득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저잣거리에서
그 여인의 앞에 서 있던 이영.

잠시 생각이 멈추었다.

이런 우연이 있단 말인가.


왜 하필 그 여인이
이영이 마음에 품은 여인이어야 했는가.


이현은 눈을 감았다.
괜한 생각이었다.



경빈의 처소.
경빈이 천천히 차를 내려놓았다.


믿을 만한 이를 하나 붙여 보내거라.


곁에 서 있던 박상궁이 고개를 숙였다.


예, 마마.


경빈이 서찰 하나를 들어 올렸다.


오늘 밤.

남문 밖 약수정으로 가라 하여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곳에 그가 있을 것이다.


경빈이 서찰을 내밀었다.


아무도 보아서는 절대 아니 된다.


이 서찰을 전하거라.


두 손으로 받았다.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물러났다.


경빈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미소가 떠올랐다.


궁 안의 바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피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