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린 노리개

전생 연분 12

by 신비


해가 서쪽 담장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마루 끝으로 스며든 늦은 햇빛이
방 안 깊숙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영은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있었다.


종이 위에는 글이 이미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붓끝은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연서의 목소리가 마루 끝에서 들렸다.
이영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말하거라.


연서는 마루에 서 있었다.


저잣거리에 함께 나가시지요.


붓끝이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곧 다시 움직였다.


오늘은 어렵다.


연서가 작게 입을 내밀었다.


또 과제이십니까.


이영이 옅게 웃었다.


오늘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연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단이와 다녀오겠습니다.


그제야 이영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연서를 바라보았다.


늦지 않게 돌아오거라.


연서는 환하게 웃었다.



예, 오라버니.

돌아서며 연서는 단이를 불렀다.


단이야.


예, 아가씨.


오라버니 드릴 간식 좀 사 오자.


단이가 밝게 웃었다.


예, 아가씨.


잠시 후
연서와 단이는 저잣거리로 향했다.
저잣거리는 여전히 활기로 가득했다.


상인들의 외침과 사람들의 웃음이 뒤섞여
늦은 오후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서는 엿과 몇 가지 주전부리를 골랐다.


이 정도면 되겠다.


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대군마마께서 좋아하실 것입니다.


연서는 작게 웃었다.


그러셔야 할 텐데.


잠시 뒤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저잣거리를 벗어나자 소란스러운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길은 점점 조용해졌다.


저녁 바람이 담장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단이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단이야—!


연서가 놀라 돌아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뒤쪽에서 달려든 사내가
연서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순식간에 자루가 연서의 머리를 덮쳤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놓으시오—!


연서가 몸부림쳤다.
그러나 사내의 손은 단단했다.


서둘러라.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연서의 몸이 그대로 들려 올려졌다.



그 시각.
저잣거리 끝자락.

이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과제는 이미 끝났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득 연서의 말이 떠올랐다.

저잣거리에 함께 나가시지요.

그저 그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이영은 저잣거리로 나왔다.


사람들 틈을 지나
저잣거리를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앞쪽 길에서
검은 옷의 사내 둘이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어깨 위에는 자루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영의 걸음이 멈추었다.
자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작은 옥노리개 하나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영의 눈이 순간 굳었다.


…저 노리개는.


연서의 것이었다.


다음 순간
이영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람이 갈라졌다.


챙—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길 위에 울렸다.


사내 하나가 칼을 뽑아 들었으나
이영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휙—


검끝이 번쩍였다.


퍽—

사내의 몸이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다른 사내가 급히 자루를 내려놓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챙—


짧은소리와 함께 그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이영의 몸이 낮게 스쳤다.
검끝이 손목을 스쳤다.


사내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철컥—


그 순간
사내의 시선이 이영의 얼굴에 닿았다.

눈이 크게 흔들렸다.


…영대군.


숨이 멎은 듯한 침묵.
다른 사내의 얼굴도 변했다.


영대군이다.


다음 순간
그들은 더 싸우지 않았다.

몸을 틀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영은 쫓지 않았다.

의 시선은 이미 바닥에 놓인 자루에 가 있었다.


천천히 자루를 풀었다.
거친 천이 벗겨졌다.


연서였다.

연서는 의식을 잃은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영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연서.


그는 조심스럽게 연서를 안아 들었다.


연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정신이 드느냐.


연서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이영의 눈이 잠시 감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 생각이 가슴을 세게 눌렀다.


그는 연서를 더욱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날 밤.

어두운 처소 안.

검은 옷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조장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말해라.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 여인을 납치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잠시 숨을 삼켰다.


…영대군이 나타났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멎었다.


그 여인을 구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잠시 침묵.
조장이 낮게 말했다.


세자와 영대군.


그리고 그 사이에 여인 하나라.


짧은 정적.




서찰을 쓰도록 하라.

이 일을 지체 없이 전하여야 하니,
사람을 보내어 아무도 모르게 전하게 하라.




한편


이영은 연서를 품에 안은 채
조용한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연서의 머리는
그의 가슴께에 기대어 있었다.

이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늘의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분명한 뜻을 가지고
연서를 노렸다.


이영의 턱선이 굳어졌다.


그자들…
반드시 찾아내리라.


그리고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이리라.


그러나 그 분노보다 먼저
그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품 안의 연서였다.


창백한 얼굴.
가늘게 이어지는 숨.

이영의 눈이 잠시 내려앉았다.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저려 왔다.


…연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밤길 위로 흩어졌다.


그는 연서를 더욱 단단히 품에 안았다.


마치


이 세상의 어떤 위험도
다시 그녀에게 닿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