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조

전생 연분 13

by 신비

희미한 아침빛이 창호를 스며들고 있었다.

현조판서 댁 내당 깊숙한 규방.


연서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보리 저고리와 보랏빛 치마가

단정히 정리된 채, 긴 머리칼이 베개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잠시 뒤


연서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이 열렸다.


“…여긴.”


익숙한 방이었다.
자신의 규방.

연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잣거리.
단이와 함께 돌아오던 길.


그리고
뒤에서 덮쳐오던 거친 손.


그 이후의 기억은 끊겨 있었다.
연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그때였다.

문밖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아씨께서 깨어나셨습니까.


단이였다.
연서는 고개를 들었다.


단이야.


단이가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씨…!


연서는 잠시 단이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단이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대군 마마께서.


연서의 눈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마마께서 아씨를 이곳까지 모셔 오셨습니다.


연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구해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날 오후.

현조판서의 사랑채.

차분한 공기가 흐르는 그곳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현조판서.
그리고 영대군 이영.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현조판서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영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저는 이 댁에 처음 온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잠시 정적.


그날부터 연서를 보아왔습니다.


현조판서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영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그 아이를 사내로서 지키고자 하네.


사랑채 안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 스승님께 약조를 청하러 왔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연서와의 혼인 약조를 허락해 주십시오.


현조판서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영 앞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대군마마.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제가 지금껏 혼자 사랑한 여식을.


잠시 말을 멈추었다.


“대군마마께 보냅니다.


그의 눈이 천천히 내려갔다.


제 여식을 평생 어여쁘게 품어주시옵소서.


사랑채 안이 고요해졌다.
그 말은 곧 허락이었다.



그날 밤.

연서의 집 뜰.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연서.


연서가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이영이 조용히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냐.


예. 괜찮사옵니다.


잠시 침묵.


연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옵니까.


이영은 잠시 연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운이 나빴을 뿐이다.

마음 쓰지 말거라.


바람이 조용히 뜰을 스쳤다.


좀 걷자꾸나.


잠시 뒤
이영이 다시 말했다.


연서.

나는 너를 지키고자 한다.


연서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스승님께도 말씀드렸다.
내가 너와 평생을 함께하려 한다고.



…연서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하는 말이 가벼이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러니 신중히 말하거라.


연서의 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네가 싫다 한다면—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나는 네 뜻을 따르겠다.


잠시 침묵.




그러나 곧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허나. 네가 나를 허락한다면.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때부터 나는 물러설 수 없다.


연서의 눈이 조용히 흔들렸다.

이영이 이어 말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너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조용히 뜰을 스쳤다.

이영의 눈이 연서를 향했다.


나는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였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날.

처음 너를 본 순간부터.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내려앉았다.


…내 삶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연서였다.


달빛이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연서의 숨이 잠시 멎었다.


…그러니.

이영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내가 너를 지켜도 되겠느냐.


잠시 침묵.

연서는 조용히 웃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늘 제 곁에 계셨습니다.


허락한 것이 맞느냐.

지금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것이냐.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음을 거둔다 하여도 늦었다. 후회한다 하여도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이영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거라.


연서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섰다.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연서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이영의 뺨에 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연서는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연서는 이영 하옵니다.


수줍게 웃으며 돌아서려는 순간—


이영의 손이 움직였다.
연서의 손목이 잡혔다.


휘리릭—

연서의 몸이 그대로 그의 품으로 끌려왔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본 연서와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영의 눈이 마주쳤다.


이영이 낮게 말했다.


다 한 것이냐.


잠시 숨이 멎은 듯한 정적.

그리고


그럼 이제는.
…내 차례다.


이영이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잠시 뒤


이영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연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이영 하옵니다라 하였느냐.


연서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영의 손이 조용히 연서의 뺨에 닿았다.


나의 연서야.


달빛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영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이영은.


잠시 숨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연서이니라.


얼굴이 붉어진 연서는
차마 이영의 눈을 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달빛 아래 비친 그녀의 뺨은
막 피어난 복사꽃처럼 곱게 물들어 있었다.


이영은 그런 연서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보아라.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연지는 따로 바르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너의 볼에.


잠시 숨이 고요히 머물렀다.


…이미 한 송이 꽃이 피었구나.


이영의 눈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참으로 곱다.


연서는 더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빛 아래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말없이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