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거울 9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많은 것을 잊는다.
누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한 장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릿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감정은 오래 남는다.
그날 왜 마음이 불편했는지.
왜 그 말을 듣고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았는지.
말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기분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가끔은 이런 기억도 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데
그 말을 듣던 순간의 공기만
이상하게 기억나는 순간.
괜히 마음이 조용해졌던 느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말이 멈췄던 순간.
말은 흐릿해졌는데
감정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
그래서 가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
“내가 그런 말 했어?”
“응, 그때 그렇게 말했잖아.”
“아닌데?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그 말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
자기 기억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둘 다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실을 기억하는 존재라기보다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는 존재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날이 별일 아닌 하루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날이 된다.
사실은 같은 일이었는데도.
그리고 때로는 기억이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분명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사람은 종종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만 기억한다.
마치 얼굴에
쿠션을 덧바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얇게 올리면
본래의 얼굴이 그대로 보이지만
급하게 덕지덕지 올리면
들뜨고
끼이고
오히려 본래의 결이 더 부각된다.
기억도 어쩌면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바라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모습으로만 덧씌우다 보면
어느 순간
사실보다 자기가 만든 기억이 더 또렷해진다.
그래서 다툼도 생긴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때 너 말투가 너무 차가웠어.”
그러면 다른 사람은 말한다.
“나는 그런 의도 아니었어.”
말은 같았지만 감정이 달랐다.
그래서 기억도 달라진다.
말한 사람에게는
그저 지나간 한 문장이지만
들은 사람에게는
그 순간의 감정이 오래 남아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말보다 그때의 마음을 더 오래 기억한다.
어떤 색을 쓰는지
어떤 선을 그리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말은
그 사람의 분위기를 남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까지
함께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말은
말보다도 이상한 기분만 남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은 사실보다 감정을 기억하는데
우리는 왜 사실만 설명하려고 할까.
“그런 의도 아니었어.”
“그냥 한 말이야.”
“별 뜻 없었어.”
하지만 그 말이 맞더라도
이미 남아버린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느꼈던 감정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어쩌면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옆에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오래 기억되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잊힌다.
그래서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사람이 기억하는 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그 순간
내 마음에 남아버린 하나의 감정일까.
어쩌면 우리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누군가 옆에서 느꼈던
나의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많은 말을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옆에서
어떤 기분이 들게 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