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15
회주의 발걸음이 처소 밖으로 멀어져 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회주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준비에 힘을 써라.
잠시 후
조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었느냐.”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둘이 앞으로 나섰다.
“예, 조장.”
조장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도성으로 간다.”
짧은 말이었다.
“정보살을 찾아라.”
사내 하나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그분을 말씀이옵니까.”
조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님의 뜻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조장이 천천히 덧붙였다.
“한 가지 더 명한다.”
사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조장의 음성이 낮게 내려앉았다.
“정보살의 눈을 마주 보지 마라.”
두 사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조장은 말을 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눈을 마주한 자는 빛을 잃는다 하였다.”
사내 둘이 동시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도성 외곽.
사람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골목 끝에
어두운 집 한 채가 조용히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짙은 향 냄새가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조장은 잠시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등불 아래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칼이
검은 물결처럼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희고 고운 얼굴이
등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원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여인은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함이 서려 있었다.
그 눈.
그 눈은 마치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하였다.
도성에 떠도는 소문이
헛된 말만은 아닌 듯하였다.
사람의 운명을 읽고 그 흐름을 비틀며
때로는 저주로 사람의 삶을 뒤흔든다
전해지는 존재.
사내 둘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찾아뵈옵니다.”
잠시 침묵.
여인의 손이 움직였다.
부채가 펼쳐졌다.
촤아악—
부채 끝이 조용히 흔들렸다.
느릿한 음성이었다.
단원이 말했다.
“회주님의 뜻을 받들고 왔사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인의 시선이 조장을 향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사내 하나의 숨이 잠시 흔들렸다.
마치
그 시선에 붙잡힌 듯하였다.
여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잠시 후
여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등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눈이 다시 떠졌다.
조장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여인의 음성이 낮게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
부채가 천천히 접혔다.
한편.
이영은 그날 밤 도성의 길 위에 서 있었다.
연서를 노린 자들.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분명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영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 갔다.
“…끝까지 찾아낼 것이다.”
낮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
그의 눈빛에는 조용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동궁.
세자 이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
달빛이 방 안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
저잣거리.
어두운 골목.
그리고 돌 하나를 던지던 여인.
이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잠시 말을 멈춘 뒤
그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참으로.”
낮은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다음 날.
현조판서는 마루에 앉아 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으나
아버지의 눈에는
그 아이의 기운이 조금 가라앉아 보였다.
잠시 후
현조판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서야.”
연서가 고개를 들었다.
“예, 아버님.”
현조판서는 부드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너라.”
잠시 미소가 스쳤다.
“저잣거리에 나가 포목전도 구경하고 오너라.”
연서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현조판서는 말을 이었다.
“늘 한 가지만 고르지 않느냐.”
연서는 조금 머쓱한 듯 웃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든 두어 개쯤 사도 좋다.”
연서는 고개를 숙였다.
“예, 아버님.”
그렇게 연서는 단이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섰다.
저잣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장사꾼들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이 뒤섞여
도성의 낮은 활기가 골목마다 번지고 있었다.
“아가씨.”
단이가 말했다.
“저기 포목전이 있사옵니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보자.”
두 사람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단들이 길게 걸려 있었고
햇빛을 받은 천들은 물결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서는 잠시 그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 한편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연서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옷을 입은 노파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옷은
이땅의 옷 같기도 하고
또 어디 다른 나라의 옷 같기도 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파였으나
피부는 놀랄 만큼 희었다.
노파가 연서를 바라보며 웃었다.
연서는 잠시 멈추어 섰다.
노파의 말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단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노파가 손을 흔들었다.
연서는 잠시 망설였다.
처음 보는 노파였다.
낯선 차림.
낯선 말투.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자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노파의 눈이
조용히 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서는 잠시 서 있다가
마치 무엇에 이끌린 듯
천천히
그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