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든 것들

전생 연분 17

by 신비

그날 이후 부터.

연서는 같은 꿈을 반복하여 꾸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허상이라 여겼으나

날이 갈수록 그 꿈은 점점 또렷해졌고

깨어난 뒤에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늘 같은 자리였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

안개가 옅게 깔린 듯 형체는 있으되 분명치 않은 공간. 그곳에 그 노파가 서 있었다.


붉은 옷자락이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서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고 백발은 빛도 없는 자리에서

희미한 윤을 머금고 있었다.


연서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노파의 입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없고

입 모양만이 느릿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연서는 그 말을 붙잡으려 하였다.


한 걸음 다가서는 순간

그 장면은 아무 일도 없던 듯 끊겨버렸다.


이어지는 꿈.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지는 손.

노파의 손이었다.

차가웠다.


살이 닿는 순간

피부를 지나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감촉.


그 순간 무언가가 들어왔다.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


거부할 수 없이

안으로 스며드는 감각.


“…허.”


그 낮은 숨소리만이 남고

다시 모든 것이 끊겼다.

연서는 눈을 떴다.

숨이 고르지 못하였다.


그저 꿈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하였고

그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집요하였다.


연서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아직 남아 있는 듯하였다.


그저 저잣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이상한 노파일 뿐이라 여겼으나

가슴 한켠에 맺힌 감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

마치 이미 무언가가 시작되었는데

자신만 그것을 모르는 듯한 기분.

아무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이

조용히, 끈질기게 연서를 따라붙고 있었다.





그 시각, 궁 안.


정상궁이라 불리는 처소 앞에는

이미 궁녀들이 나와 서 있었다.


새로 드는 상궁이라 하나

그 기색이 범상치 않다 하여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소리는 없었다.


그저 공기가 한 겹 내려앉은 듯하였다.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운 얼굴. 백옥을 깎아낸 듯한 피부.


화려하되 흐트러짐 없는 상궁의 옷차림이

조용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완벽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 같지 않았다.

궁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정상궁 마마님을 뵙습니다.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렸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궁녀 하나의 숨이 막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더 들 수 없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조심스레 올린 말이었다.


정상궁은 그 말을 들은 듯도, 아닌 듯도

아주 잠깐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내 처소엔.


짧은 멈춤.


아무도 들어와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말은 작았으나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궁녀들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안과 밖의 기운이 완전히 갈라졌다.

정상궁은 아무 소리 없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숨결조차 남지 않는 움직임.


벽 앞에 멈춰 손을 얹었다.


잠시 후

아주 미세하게 벽이 갈라졌다.


숨겨진 공간.


정상궁은 그 안으로 스며들 듯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등불 하나가 아주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 앞에 앉았다.


잠시 후

숨겨진 또 다른 문,


어둠 속에서 기척이 다가왔다.


아뢰옵니다.


그 여인의 사주를 가져왔사옵니다.


서찰 하나가 조용히 내밀어졌다.


허연서.

생년.

생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등불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아주 낮은 숨.


손끝이 종이 위에 멈췄다.


누가.


짧게 끊겼다.


이 아이를.


그 눈이 아주 천천히 가늘어졌다.


들여다본 것이냐.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 하나로 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손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짧은 침묵.


등불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그 눈이 아주 깊게 내려앉았다.


이대로 두면.”


아주 낮게


틀어지겠구나.


그리고


준비를 하여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신당 안의 공기가 완전히 식었다.






한편 이영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사내 하나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군마마.


이영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말하라.


짧은 한 마디였다.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알아보라 하신 일. 심상치 않습니다.


이영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말을 잇거라.


움직임이 정리되어 있었으며 수하들이 보기에 비밀 조직인 듯하옵니다.


짧은 침묵.


사내가 조금 더 낮게 말을 이었다.


궁과도 이어진 듯하옵니다.


샅샅이 파헤쳐 반드시 밝혀내겠사옵니다.


정적이 흘렀다.

이영의 손이 천천히 쥐어졌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더 무거웠다.


끝까지 파헤쳐라.


낮고 단단한 음성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노리는지.


모조리.


사내가 머리를 바닥에 닿을 듯 숙였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잠시 후

이영의 입에서 아주 낮은말이 흘러나왔다.


감히.


그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말 안에는

이미 끝이 정해진 것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꿈과 현실

궁과 도성


보이지 않는 흐름들이

서로를 향해 천천히 맞물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허연서가 있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