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18
정상궁에게 교지가 내려왔다.
왕명을 받들어 동궁전을 보필할 최고 상궁으로 명한다는 엄중한 뜻이었다.
“정상궁은 동궁 전 최고 상궁으로 명한다.
세자를 보필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정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교지를 받들겠사옵니다.”
그 음성은 고요했으나
그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동궁? 훗.”
아주 미세하게 입가가 스쳤다.
“재밌겠군.”
그렇게 정상궁은 동궁 전으로 향하였다.
동궁 전 앞에 이르자 궁녀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정상궁 마마님을 뵙습니다.”
정상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리조차 남기지 않는 걸음으로 조용히, 그러나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안으로 들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동궁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가라앉았다.
세자 이현이 시선을 들었다.
정상궁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예를 올렸다.
“동궁 전에 새로 들게 된 정상궁이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낮고도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성심을 다하여 세자저하를 보필하겠사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었다.
누군가 숨을 죽인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압이 방 안을 조용히 눌러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주 은은한 향이 안에 번졌다.
짙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향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현의 시선이 천천히 정상궁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멈추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이었다.
자신조차 그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흘러나온 감탄.
어찌 저리 고운 여인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다음 순간,
시야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슴이 조여 오는 듯하였고
숨이 고르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현의 손이 의자 끝을 짚었다.
그 짧은 순간
정상궁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들렸다.
그 눈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 속에는 사람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잠겨 있는 듯하였다.
“저하.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낮고도 정돈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단순히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귓속 깊이 스며들 듯 내려앉았다.
“제가 살펴보아도 되겠사옵니까.”
이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하라.”
정상궁이 천천히 다가섰다.
걸음에는 기척이 없었고 움직임에는 티끌만 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녀의 손이 들려 세자의 이마에 닿았다.
보드라운 손길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 닿는 순간,
조여 오던 숨이 서서히 가라앉고
흔들리던 시야가 잦아들었다.
이내
너무도 쉽게, 편안해졌다.
이현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은은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향내가 좋다.”
그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정상궁의 손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잠시 기운이 상하신 듯하옵니다.”
“잠시 안정을 취하시면 곧 나아지실 것이옵니다.”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정상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했다.
눈을 떼려 하였으나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정상궁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세자저하.”
그러나
고개를 숙인 그 순간,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그 입가에
아주 미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각
이영은 마침내 하나의 단서를 붙잡았다.
문 밖에 엎드린 수하가
낮게 입을 열었다.
“대군마마.”
“단서를 찾았사옵니다. 암월회라 불리는 비밀 세력이 있다 하옵니다.”
“세자저하와도 관련이 있다는 말이 돌고 있사옵니다.”
정적이 흘렀다.
이영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세자저하와.”
그리고 아주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이어졌다.
“어찌하여 세자와 관련이 있는 조직이 연서를 납치한단 말인가.”
그의 손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이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이영은 연서를 불렀다.
환하게 웃으며 걸어온다.
“오라버니.”
이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낮고 단단한 음성이었다.
연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자에 대하여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느냐.”
잠시 침묵
연서는 망설이다 작게 입을 열었다.
“속일 마음은 없었사오나.”
그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걱정하실까 하여서였사옵니다.”
“어떤 자들이 한 사내를 미행하고 있었사옵니다.”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제가 돌을 던져
그 사내를 구해주었사옵니다.”
짧은 숨이 흔들렸다.
“그런데, 그자가 그날의 그 사람이었사옵니다.”
“그것이 다이옵니다.”
“내가 없을 때는 나서지 말라 그리 당부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나섰느냐.”
이영의 음성은 낮았으나
그 안에 담긴 기운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연서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사옵니다.”
이영의 눈이 천천히 좁혀졌다.
차갑게 떨어진 말이었다.
연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서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순간 이영이 조용히 다가섰다.
그리고
뒤에서 연서를 꼭 안았다.
연서의 숨이 작게 멎었다.
이영의 음성이 아주 낮게 떨어졌다.
“다그치는 것이 아니다.”
짧은 침묵.
“연서.”
그의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너는 내가 제일 아끼는 내 사람이다.”
연서의 눈이 가만히 흔들렸다.
“…내가 너를 지키려면 알아야 한다.”
그의 숨이 아주 가까이 닿았다.
“…알았느냐.”
연서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라버니.”
이영의 시선이 서서히 식어갔다.
“그래서였구나.”
낮은 음성이었다.
“세자저하와 관련이 있는 조직이
연서를 노린 것이. 엮일일이 아닌데 엮여버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굳어졌다.
“이것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짧은 침묵.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이것은
막아야 할 일이 아니라
끝까지 파헤쳐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