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19
그날 밤,
정상궁은 처소에 들자마자 잠시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곧장 안쪽 벽 앞으로 향하였다.
그녀의 손끝이 닿는 순간
스르르,
숨결보다도 얇은 기척과 함께 벽이 미세하게 갈라지며 어둠이 먼저 드러났다.
정상궁은
그 틈을 바라보는 일도 없이 몸을 들였고,
이내 뒤에서
툭,
하고 벽이 닫히자 바깥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끊어졌다. 그 안은 신당이었다.
촛불이 여럿 켜져 있었으나 방 안을 밝히지는 못하고 각자의 자리에서만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으며, 가느다란 향 연기는 위로 곧게 오르지 못한 채 낮게 눌려 천장 아래를 맴돌고 있었다.
향내는 짙지 않았으나 숨을 들이킬수록 깊이 내려앉아 사람의 기운마저 가라앉히는 듯하였다.
정상궁은 말없이 그 안을 지나 더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신당 가장 안쪽, 감추어진 또 하나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는 이미 사람이 선 듯한 기척이 서려 있었고, 바람 한 점 없던 촛불이 그 순간 길게 흔들렸다.
“왔느냐.”
낮고 고요한 음성이 신당 안에 스며들었다.
잠시 뒤
스르르,
문 저편의 어둠이 갈라지듯 물러나며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깊이 고개를 숙였다.
“회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정상궁은 그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은 서늘하게 깊었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주께 아뢰어라.”
촛불 하나가 가늘게 떨렸다.
향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이상 반응이 있었노라.”
그 말은 짧았으나 덧붙일 것이 없었다.
“허나 문제는 없다.”
잠시 숨조차 낮아지는 정적이 흘렀다.
“이제 시작되었다고.”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신당 안의 불빛이 일제히 눌리듯 낮아졌고, 향 연기는 아래로 흘러내리듯 가라앉았다.
문 앞에 서 있던 형체는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으며, 스르르,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내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촛불과 향, 그리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고요뿐이었다.
정상궁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소매 안으로 손이 들어가더니 얇은 종이 한 장이 드러났다. 허연서의 생년과 시각이 적힌 것이었다.
그 이름 위로 시선이 내려앉는 순간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뒤틀리는 듯 눌렸다.
이어 다른 손이 움직여 닭의 피로 적힌 붉은 부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촛불이 동시에 흔들렸고, 향내는 위로 오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정상궁의 입술이 열렸다.
기도가 낮게 흘러나왔다.
작았다. 그러나 흐릿하지 아니하였다.
한 음,
한 음이 또렷이 내려앉아 신당 안을 채웠고, 그 소리가 겹칠수록 불빛은 길어졌다가 다시 눌리기를 거듭하였다.
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움직여 허연서의 생년과 시각이 적힌 종이 위에 부적을 겹쳐 올리는 순간.
신당 안의 기운이 한순간에 멎은 듯 가라앉았다.
그렇게 의식이 시작되었다.
잠시 뒤, 정상궁은 기도를 멈추지 않은 채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촛불에 비친 얼굴은 여전히 고왔으되, 입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색이 스며 있었다.
“흐름이 이리도 얽히는구나.”
낮은 숨이 섞였다.
“…참으로 흥미롭도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매가 길게 흘러내리며 허공을 스쳤고, 그 움직임에 맞추어 촛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한 발,
또 한 발
발끝이 바닥을 스치는 동작은 분명 춤이었으나,
단정함 속에 기묘한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시익—”
아주 얇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크게 흐르듯 움직였고,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히 서며 그 웃음은 신당 깊숙이 스며들었다.
같은 밤,
연서는 깊이 잠들지 못한 채 얕은 숨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꿈속으로 스며들었다.
발이 닿았다. 소리는 없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곳.
어디라 말할 수 없는 자리였다.
연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앞쪽에서 붉은 기색이 드러났다.
노파였다.
붉은 옷과 백발,
낮에 마주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연서의 발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툭.
노파의 손이 내려와 신발을 벗겨냈다.
연서는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노파는 연서의 앞을 막아섰다.
그 음성은 낮았으나 분명하였다.
허나
잠시 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짙은 어둠이 서서히 드러났다.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기운.
발을 들이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서늘함이 그 안에 서려 있었다.
노파는 급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네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낮게 울리는 듯한 기운이 번졌다.
순간
그 어둠 위로 검은 기운이 드리워지듯 내려앉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보이지 않던 막이 단숨에 내려온 듯—
그 안과 바깥이 갈라졌다.
노파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으려 하였으나, 그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하였다.
앞이 닫혔다.
소리가 막혔다.
노파의 입이 분명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 어떤 말도 연서에게 닿지 않았다.
연서는 다급히 발을 옮기려 하였으나 맨발은 바닥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고, 눈앞은 점점 더 짙은 어둠으로 잠겨 갔다.
그 순간—
연서의 시야가 끊어지듯 꺼졌다.
연서는 그대로 눈을 떴다.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방 안은 고요하였다.
그러나
방금까지 들을 수 있었던 말이 바로 눈앞에서 끊겼다는 사실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한편
동궁의 밤 또한 고요하지 않았다.
세자 이현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눈을 감으면 이내 떠올랐다.
이마에 닿았던 손길.
조여 오던 숨이 풀리던 순간.
그리고
그 향. 은은하였으나 지워지지 않았다.
“곱다.”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처음이었다.
여인을 보고 저토록 또렷이 마음이 움직인 것이.
문득 저잣거리에서 마주쳤던 여인이 스쳤다.
허연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무례하였지.”
낮게 중얼거렸다.
“…다르다.”
짧은 말이었으나 분명하였다.
정상궁은 달랐다.
단정하였고,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그 고요함 속에
묘하게 사람을 붙드는 것이 있었다.
이현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물음에 답은 없었다.
그 밤 내내
그녀의 모습과 향, 그리고 손길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현은 끝내 깊이 잠들지 못하였다.
겉으로는 고요한 밤이었으나, 그 고요 아래에서
이미, 엇갈린 흐름이 서서히 얽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이영 또한 놓치지 아니하고 있었다.
밤은 깊었으나 그는 자리에 들지 아니한 채
등불 아래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움직임은 없었으되 그 고요는 비어 있지 아니하였다.
그날의 사건.
비밀조직의 정체.
그리고 이어지는 흔적.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줄로 맞물리듯 천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아주 낮은 기척 하나가 멈추었다.
이영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들렸다.
“들라.”
문이 열리고 수하 하나가 안으로 들었다.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대군마마.”
수하가 숨을 낮추어 아뢰었다.
“…뒤를 밟고 있사온데, 점점 가까워지고 있사옵니다.”
짧은 말이었으나 가볍지 아니하였다.
이영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같은 줄이더냐.”
낮게 떨어진 물음이었다.
수하의 고개가 더욱 낮아졌다.
“…예, 대군마마.”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등불 끝이 아주 가늘게 흔들렸다.
이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나
그 침묵은 망설임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흐름이
더욱 또렷해지는 순간의 것이었다.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 가까이 붙어라.”
짧고 단단한 음성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수하는 곧장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문이 닫히고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영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을 감지 아니하였다.
그 시선 끝에는
단 하나, 연서가 있었다.
그 밤,
정상궁은
어둠 깊은 곳에서 흐름을 흔들고 있었고,
연서는
닿지 못한 말을 꿈속에 남긴 채 깨어났으며,
이현은
처음 스민 감정의 결을 붙들지 못한 채 밤을 지새우고 있었고,
이영은
그 끝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터지지 아니하였으나
그러하기에 더 숨 막히는 밤이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하였으나,
정작 그 고요 아래에서는
이미, 다음 피바람을 향한 숨이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