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20
교지가 내려졌다.
내관이 두 손으로 받들어 펼치고, 낮게 낭독하였다.
짧은 한 줄이었다.
이어
그 말이 더해지자, 조정 안의 숨이 일시에 눌렸다.
지금 이 시각부터 궁 안팎을 막론하고 혼인을 금한다는 뜻이었다.
더는 말이 없었다.
명은 이미 내려졌고, 받드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조정에 선 자리에서
현조판서의 얼굴빛이 가라앉았다.
그의 눈이 아주 잠시 멈추었다.
스친 것은 오직 하나 연서였다.
관아에 방이 붙었다.
포졸들이 골목과 장터를 돌며 목소리를 높였다.
북이 울렸다.
쿵—
한 번, 그리고 다시—
쿵.
장터의 소음이 그 소리 하나에 뚝 끊겼다.
“열둘에서 열아홉까지의 처녀는
혼인을 금하고,
각 가문은 기한 내에 단자를 올릴지어다.”
사람들의 숨이 멎었다.
손을 맞잡고 있던 이는 그 손을 놓쳤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웃음은 사라지고, 말은 이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날,
사랑은 죄가 되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급히 가까워졌다.
단이가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안으로 들었다.
“아씨.
금혼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짧은 말이었다.
허나 가볍지 아니하였다.
연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말은 이어지지 아니하였다.
그저—
숨이 잠시 멎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
이영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연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영은 잠시 답하지 아니하였다.
연서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연서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때—
“허나.”
이영의 음성이 이어졌다.
짧은 숨.
“너와 나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
연서의 숨이 그제야 풀렸다.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하옵니다.
연서는 이영이옵니다.”
연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저,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짧았으나 망설임이 없었다.
이영의 눈이 잠시 머물렀다.
금혼령은 그에게도 가벼운 명이 아니었다.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고, 이미 정해진 뜻이 있었다.
그런데 나라의 명이 그 위로 내려앉았다.
이영의 시선이 조용히 식어갔다.
궁으로 들어간다.
전하를 뵌다. 할마마마께 아뢴다.
마음에 둔 여인이 있음을,
그 뜻이 이미 정해졌음을.
혼인을 하사 받아 그 관계를 분명히 하겠다는 생각이 그의 안에 조용히 굳어지고 있었다.
동궁의 밤.
북소리는 그곳에도 닿았으되—
이현의 마음은
그 소리에 머물지 아니하였다.
금혼령.
그 말 또한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오직 하나.
정상궁이었다.
그녀가 궁으로 들어온 이후,
이현의 밤은 달라졌다.
조여 오던 가슴이 가라앉았고,
쉽게 이루지 못하던 잠이 들었으며,
들지 않던 수저 또한 자연히 들렸다.
그 모든 변화의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정상궁.
그녀가 가까이 설 때마다,
은은한 향이 아주 천천히 스며들었다.
지나간 뒤에도 남는, 끊어지지 아니하는 기운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 향은 스치지 아니하고 남았다.
이현의 숨이 깊어졌다.
“…정상궁.”
이름을 불렀다.
망설임은 없었다.
정상궁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허나 곧 시선을 내렸다.
“예.세자저하.”
짧고 단정한 예였다.
이현이 다가섰다.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손이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상궁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멎었다.
허나 그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잡힌 채를 그대로 두었다.
“…저하.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부드러웠으나 선을 긋는 말이었다.
허나 이현의 손은 놓이지 아니하였다.
“하여?”
짧은 물음.
정상궁의 눈이 아주 잠시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신 아주 천천히 한 발 다가섰다.
피하지도, 허락하지도 아니한 채. 숨이 가까워졌다.
정상궁의 소매가 그의 손등을 스쳤다.
우연처럼 그러나 남도록.
그 향이 조금 더 짙게 내려앉았다.
지나가듯 스친 것이 아니었다.
머물렀다.
이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물러서지 아니하는구나.”
정상궁이 아주 낮게 답하였다.
“부르심을,
어찌 거역하겠사옵니까.”
순종 같았으나 그 뜻은 잡히지 아니하였다.
이현의 손이 더 당겨졌다.
정상궁이 그만큼 가까워졌다.
허나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 틈이 남았다.
정상궁의 손이 들려 이현의 가슴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밀어내지도 아니하고, 끌어당기지도 아니한 채
그저, 머물렀다.
짧았으되 깊게 남았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스쳤다.
놓일 듯,
남을 듯.
이현의 숨이 완전히 깊어졌다.
“머물러라.”
이번에는 명에 가까웠다.
정상궁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명을 거두어주시지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냈다.
억지로가 아니었다.
흐르듯, 자연스럽게.
허나 완전히 멀어지지 아니하였다.
한 걸음.
그 거리 하나를 남겼다.
이현의 손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더 빨랐다.
그러나 닿기 직전.
정상궁이 아주 미세하게 물러섰다.
닿지 않았다.
그 틈이 남았다.
그 순간,
이현의 눈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눈을 떼지 못하였다.
정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 더 다가오지 아니하였다.
그 애매한 틈 위에서 세자의 마음이
점점 더 깊이 붙잡히고 있었다.
그날,
금혼령은 내려졌으나 묶인 것은 혼인만이 아니었다.
닿지 못한 거리 하나가
오히려 더 깊게,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