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21
금혼령이 내려진 뒤,
며칠이 지나지 아니하였으되
현조판서 댁 집 안의 공기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겉으로는 고요하였으나,
그 고요는 비어 있지 아니하였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마저 가볍지 아니하였고,
사람의 발소리 또한 이상하리만치 낮아져 있었다.
현조판서는 말이 적어졌다.
늘과 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되,
시선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였다.
한 번 닿았다가, 이내 거두어지는 눈이었다.
금혼령.
그리고
세자빈 간택.
이는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이었다.
정해진 기한 안에 단자를 올리지 아니하면
그 자체로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었다.
허나 그에게는 이미 약조가 있었다.
연서.
그리고 영대군마마.
그 혼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진 일이었다.
서로의 뜻이 오갔고,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이
이미 그 집 안에 서려 있었다.
말로 다시 꺼내지 아니하여도,
이미 굳어진 일이었다.
허나
법은 사람의 마음을 기다려주지 아니하였다.
시간이 그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날, 현조판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단자를 준비하라.”
짧은 말이었다.
허나 그 안에는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약조를 지키려는 마음과, 명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서로 맞부딪히고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아니하였으되,
무언가가 분명 달라졌다.
그때
“…단자를 올리지 마시게.”
낮게 떨어진 음성이었다.
높지 않았으나, 분명하게 방 안을 눌렀다.
현조판서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대군마마.”
이영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이는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나라의 명이옵고, 기한 또한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말은 공손하였으나,
그 안의 뜻은 조금도 가볍지 아니하였다.
이영이 한 발 다가섰다.
걸음은 조용하였으되,
그 한 걸음이 방 안의 공기를 바꾸었다.
“…알고 있네.그대 입장을.”
짧았다.
“…허나 그 약조 또한, 내가 잊지 않았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영의 시선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피하지 아니하는 눈이었다.
“…내가 입궐하겠네.”
짧게 끊었다.
“…전하를 뵙고, 대비마마와 중전마마께도
내가 직접 말하겠네.”
잠시
그의 눈이 더 깊어졌다.
“내 마음에 연서를 두었다 하지 않았느냐.”
“…이미 정한 일이네.”
그 말은 되돌릴 수 없는 뜻이었다.
설명도, 변명도 아니었다.
그저 정해진 것이었다.
“…이 혼사,”
아주 잠시 숨이 멎었다가,
“…내가 꼭 받아내겠네.”
조용히 떨어졌으나 거스를 수 없는 말이었다.
현조판서의 손이 소매 안에서 굳었다.
“…대군마마.”
잠시 말을 고르고
“시간이 없사옵니다. 허락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단자를 올리지 아니할 명분이 서지 아니하옵니다.”
짧은 정적.
“간택이 시작되면, 연서 또한 그 안에 들게 될 것이옵니다.”
그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연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이 자리 위에 놓였다.
이영의 눈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전에 끝내겠네.”
짧았다.
“허락을 받아내겠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올리지 말게.”
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현조판서는 더 말을 잇지 아니하였다.
다만 아주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약조를 지키려는 자와, 시간에 쫓기는 자.
그 사이에 선 사람의 얼굴이었다.
“단자는—”
말이 멈추었다.
이내, 조용히 이어졌다.
“…기한 끝까지 미루어 두겠사옵니다.”
허락이 아니었다.
유예였다. 그 한마디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영은 고개를 숙이지 아니하였다.
그저 서 있었다.
그날, 처녀단자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연서는 말이 없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으나,
발이 닿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숨이 가라앉아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도 가볍게 풀리지 아니하였다.
이영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그 시선이 연서에게 닿았다.
말이 없었다.
허나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아니하였다.
이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연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서야.”
낮게 부른 이름이었다.
연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못하였다.
이영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 손이 연서의 뺨에 닿았다.
따뜻하였다.
그러나 그 온기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아니하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짧은 말이었다.
허나 그 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지킨다 하지 않았느냐.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다.”
연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영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
“…너는 이미, 내 여인이다.
이제는 달아날 수 없다.”
그 말이 떨어지자, 연서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 순간.
이영이 조금 더 다가섰다.
거리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조용히 입맞춤이 닿았다.
짧았다.
허나 스쳐 지나가지 아니하였다.
아주 잠시, 숨이 이어지는 만큼 머물렀다.
연서의 숨이 흔들렸다.
손이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멈추어 있었다.
이영이 천천히 물러났다.
손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다녀오마.”
낮게 떨어진 말이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짧았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영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뒤돌았다.
더는 멈추지 아니하였다.
말이 준비되었고, 곧장 궁으로 향하였다.
바람이 세차게 스쳤으나,
그의 걸음은 늦추어지지 아니하였다.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정한 길이었다.
궁문이 열리고, 수문장이 고개를 숙였다.
“대군마마를 뵈옵니다.”
이영은 멈추지 아니하였다.
곧장 안으로 들었다.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으되멈추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전하.
아버지였다.
그를 뵙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미루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전 앞에 이르렀다.
내관이 급히 안으로 들었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들라 하시옵니다.”
이영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는
안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