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22
대전 안은 고요하였다.
향은 낮게 깔려 있었고, 촛불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아니하는 그 적막 속에서, 오히려 사람의 숨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질 만큼 공기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앞에 이영이 섰다.
들어선 뒤로 단 한 번도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아니하였고, 숨을 고르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아니하였다. 물러설 생각 또한 없었다.
짧게 떨어진 음성이었다.
“…예, 전하.”
이영의 대답 또한 짧았다.
전하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잠시 말이 없었다. 다만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대전 안의 공기는 더욱 묵직해졌다.
이내 전하가 입을 열었다.
“입궐한 까닭이 무엇이냐.”
이영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아뢰고자 하여 왔사옵니다.”
아주 잠시, 말끝에 머무는 숨이 있었다.
“…금혼령에 관하여이옵니다.”
그 순간, 촛불의 불꽃이 아주 작게 일렁였다.
전하의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
“금혼령이라.”
짧게 되짚는 말이었다.
“그것이 네 입에서 나올 말이더냐.”
말은 낮았으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하였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대전 안의 공기는 다시 한번 눌려 내렸다.
허나 이영은 눈을 떼지 아니하였다.
“아바마마.”
낮게 불렀다. 그 부름 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소자는 단 한 번도 명을 거스르거나 거역한 적이 없사옵니다.”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이 오히려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의 스승이신 현조 판서댁에 들던 날이었사옵니다.”
말은 이어졌다. 천천히, 허나 끊기지 아니하고.
“…그때, 소자는 제 의지로 사는 몸이 아니었사옵니다.”
아주 잠시, 숨이 고였다가
“…허나 한 여인이, 저를 오라버니라 불렀사옵니다.”
그 말이 대전 안을 스쳤다.
“그 부름 하나로, 소자의 세상이 밝아졌사옵니다.”
전하의 시선이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추었다. 이영은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날부터 그 여인을 연모하였사옵니다.”
짧은 정적.
“이미 마음에 담았고, 정인이라 여겨왔사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대전 안은 더 깊은 고요에 잠겼다. 누구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조 판서의 여식이라.”
짧게 되짚었다.
“현조 판서의 여식이라면, 성정이 곧고 더할 나위 없겠구나.”
짧은 숨이 섞였다.
“…그 여인은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느냐.”
전하의 시선이 이영에게 닿았다.
“…고운가.”
“…혹 미색만 보고 마음을 둔 것은 아니더냐.”
옅은 웃음이 스쳤다. 짧은 농이 었으나, 그 안에는 분명한 살핌이 담겨 있었다.
이영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아니옵니다.”
짧게 답하였다.
“제 세상에서는 제일 고운 여인이 맞으나, 그 여인은 소자의 세상을 바꾼 여인이옵니다.”
그 말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내려앉았다.
향이 천천히 퍼졌다.
이영의 숨은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바마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자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사옵니다.”
아주 짧은 틈.
그 틈 끝에서—
“…소자,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처음으로,
그의 음성이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부디,”
숨이 한 번 스치듯 흔들렸다가,
곧 가라앉았다.
“소자가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그 말이 내려앉았다.
고요하였다.
허나 그 어떤 말보다 깊었다.
이영은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아니하였다.
“그저 그 여인과 사랑하며 살고 싶사옵니다.”
말이 이어졌다.
“…소자가 처음으로 청하는 일이옵니다.”
그 한마디는 조용하였으되 무거웠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하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아니한 채 이영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영이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기억하시옵니까.”
전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릴 적, 소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 하셨사옵니다.”
향이 가늘게 퍼졌다.
“세자 자리를 빼고는, 그 무엇이든 하나는 주겠다 하셨사옵니다.”
정적.
그 말이 또렷하게 남았다.
이영의 시선은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소자, 그 약조를 믿고 있사옵니다.”
“청하옵니다.”
그리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떨어졌다.
“…허연서를.”
그 이름이 대전 안에 깊게 박혔다.
완전히. 전하의 시선이 멈추었다.
이영은 눈을 떼지 아니하였다.
잠시 뒤 전하가 입을 열었다.
“…영아.”
짧았다.
“너는 총명하고 뛰어났으나, 세자를 이길 수 있었음에도 늘 지는 길을 택하였지.”
“왕이 되고 싶으냐 묻던 날에도, 늘 같은 말을 하였다.”
짧은 정적.
“소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으며, 형님이 마땅하다 하였지.”
“그리고 자유롭게 다니며 세상을 살피고 싶다 하였고.”
그 말은 지나온 세월을 짚는 것이었다.
전하의 시선이 깊어졌다.
“…그리하던 네가, 이리도 간절히 청하는 것이로구나.”
“평소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던 네가, 이리도 간절히 마음을 드러낼 만큼의 아이라면, 나 또한 그 아이가 보고 싶구나.”
그리고
짧았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분명하게 갈랐다.
“…나는 허락하마.”
아주 조용히
“이번만큼은, 네 편에 서 주겠다.”
그 말이 내려앉는 순간,
대전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허나
전하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아니하였다.
“허나 혼사는 내명부의 일이기도 하다. 나의 뜻만으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대비마마와 중전의 뜻 또한 들어야 할 것이다.”
정적.
길이 열렸다.
허나—
쉬운 길은 아니었다.
전하의 시선이 다시 이영에게 닿았다.
“너는, 따뜻한 아이였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렸다.
“빈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채우는 아이였지.”
잠시
“그리하여,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보았으면 한다.”
그 말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네 말은 잘 알았다.”
짧게 끊었다.
“대비마마를 뵙고, 중전을 뵈어라.”
아주 잠시
전하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내가 윤허하였다 고하라.”
그 한마디가 남았다.
이영은 그제야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